[시진핑시대 핵심100인]<21>창완취안 – 선저우7호 화룡점정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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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6-0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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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선저우(神舟) 7호가 예정궤도에 진입했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선저우 7호 발사에 성공했음을 선포합니다.”

흥분에 떨리면서도 우렁찬 목소리가 중국의 CCTV를 통해 들려오자 선저우 7호 발사 이후 조마조마해하던 13억 중국인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역사적인 순간을 장식한 이 두마디의 주인공은 창완취안(常万全) 인민해방군 총장비부장 겸 중국유인우주프로그램 총지휘관이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중국은 중국의 우주탐험 사상 처음으로 우주유영을 시도하는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7호’를 그해 9월25일 밤 9시10분(현지시간) 간쑤(甘肅)성 주취안(酒泉) 위성발사센터에서 쏘아올렸다.

자이즈강(翟志剛)과 류보밍(劉伯明), 징하이펑(景海鵬) 등 3명의 우주인을 태운 선저우 7호가 지구 상공 343km 궤도에 진입하자 창완취안은 주저없이 마이크를 잡고 중국인민들에게 발사성공을 선포했다.

이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주취안 위성발사센터 종합상황실에서 연설을 통해 “동지들, 선저우 7호 발사 성공은 선저우 7호가 부여받은 임무의 첫번째 승리를 상징하는 것”이라면서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를 대표해 이번 작전에 참여한 모든 직원들과 군부대에 열렬한 축하를 보낸다”고 치하했다.

시진핑(習近平) 부주석과 리커창(李克江) 부총리, 우방궈(吳邦國) 전인대 상무위원장, 자칭린(賈慶林) 전국정협 주석 등 정치국 상무위원들도 이날 베이징 우주항공센터에 나와 우주선 발사의 성공을 지켜보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3억 중국인은 TV를 통해 중국이 배출한 우주인들의 비행을 지켜보며 자국의 우주과학 기술 발전에 자긍심을 느끼며 박수를 보냈다.

선저우 7호가 지구 상공 343km 궤도에 진입해 90분마다 한 바퀴씩 지구를 29바퀴 돈 뒤 27일 오후 4시43분께 자이즈강이 궤도모듈에서 빠져나와 17분 정도 우주유영에 성공했다. 선저우 7호는 다음날 오후 5시37분 68시간 동안을 비행한 후 네이멍구(內夢古)의 초원지대에 착륙했다. 러시아와 미국에 이어 세번째로 독자적인 기술로 우주유영에 성공한 것. 선저우 7호가 예정된 임무를 모두 수행하고 성공적으로 귀환했음을 공식선언한 것도 물론 창완취안이었다.

◆우주복 국산화 위해 발사 1년연기

2007년 총장비부장에 오른 후 창완취안은 인민해방군 장비의 첨단화에 자신의 일생을 걸다시피했다. 취임직후 44개의 중대과제, 56개의 주요개선사항, 76개의 긴급개선사항을 책정해 해결을 독려했다. 또한 겸직하고 있던 중국유인우주프로그램 총지휘의 권한으로 선저우7호의 발사를 1년여 연기하는 조치를 단행한다. 이유는 유영에 필요한 우주복의 국산화였다.

중국의 우주개발 계획 3단계 중 1단계인 유인우주선 발사 및 귀환에 이미 성공한 중국은 선저우7호를 통해 2단계인 우주유영에 성공하겠다는 계획이었다. 3단계는 우주선 도킹 및 우주정거장 건설이다. 즉 선저우7호 발사의 최대목적인 우주유영에 나설 우주인이 외국에서 수입한 우주복을 입고 유영을 하면 안된다는 게 창완취안의 주장이었다. 그는 인민해방군 수뇌부를 설득해 발사를 1년여 미루고 기술개발을 독려해 우주복 국산화에 성공했다.

창완취안이 총지휘를 한 선저우 7호에는 263가지의 진보된 기술이 탑재됐고, 110여개의 연구소가 참여했다. 또한 3000여개의 관련업체와 기관도 유기적으로 연계했다. 총지휘는 창완취안이었고, 인민해방군 총장비부 부부장인 장젠치(张建启) 중장, 중국 항공우주과학기술집단의 마싱루이(马兴瑞) 사장, 중국과학원 장몐헝(江绵恒) 부원장, 국방과학공업국 부국장겸 우주비행국 국장 쑨라이옌(孙来燕) 등 4명이 부총지휘였다. 이 중 장몐헝 부원장은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장남이다. 선저우7호 발사 성공으로 총지휘인 창완취안의 출세가도에 청신호가 켜졌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무겸비에 후진타오 신임 두터워

창완취안은 현재 중국 공산당의 중앙군사위원회 구성원 중 군출신 멤버인 10명중 한명이다. 중앙군사위원회는 인민해방군 최고의사결정기구로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진타오 총서기가 주석, 시진핑 국가부주석이 부주석을 맡고 있다. 군출신 인사로는 궈보슝(郭伯雄), 쉬차이허우(徐才厚)가 부주석을 맡고 있고, 량광례(梁光烈) 국방부장, 4총부장인 천빙더(陳炳德) 총참모장, 리지나이(李繼耐)총정치부 주임, 랴오시롱(廖錫龍) 총후근부장, 창완취안 총장비부장과 징즈위안(靖志遠) 제2포병대 사령관, 우성리(吳勝利) 해군사령관, 쉬치량(許其亮.) 공군사령관이 차지하고 있다.

창완취안은 10명중 나이가 쉬치량에 이어 두번째로 어리다. 또한 “군을 사랑하고, 사병에 따뜻하고, 용맹하며, 남성적이고, 야심이 없이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한다”는 군부 내의 평가를 받고 있다. 때문에 후진타오 주석의 신뢰 또한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단장, 군단장, 베이징(北京) 군구 참모장, 선양(瀋陽) 군구 사령원 등 주요직무를 거쳐왔으며, 국방대학 전투연구실 주임 등을 맡은바 있어 문무를 겸비한 군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에 더해 선저우 7호의 발사를 성공시키면서 그는 차기 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오를 가능성이 그 누구보다 커졌다. 실제 우주개발계획은 중국 공산당으로 말하자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물론 중화민족의 영예에 직결되는 것이므로 성공적으로 발사한 책임자에게는 높은 직위로 승진을 시켜왔다.

◆19세 사병입대, 48세 소장진급

창완취안은 1949년 1월 허난(河南) 난양(南陽)출신으로 난자오(南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85년에서 1987년까지 산시(陝西) 웨이난(渭南)사범전문학교에서 통신을 공부했고, 1994년에서 1995년까지 국방대학 기본과에서 학습했다.

창완취안은 1968년 2월 란저우(蘭州)군구의 육군사병으로 입대했다. 중국 7대군구 중 하나인 란저우군구는 간수(甘粛)성, 칭하이(青海)성, 산시(陝西)성, 닝샤(寧夏)회족자치구, 신장(新疆)위그루자치구 등지를 담당하는 곳이다.

창완취안은 1970년 사단사령부에서 훈련참모를 맡으며 군사간부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81년 육군 47군 사령부의 작전훈련처장을 맡아 군사훈련공작을 주관한다.

1984년에는 란저우군구의 작전부장에 올랐고, 1985년 육군 140사단 부사단장으로 승진한다. 이어1988년에는 군에 사병으로 입대한지 20년만에 대교(우리나라의 대령과 준장 사이) 계급에 오른다. 1990년 란저우군구 사령부 전투부장을 맡은 후 1992년에는 육군의 61사단장에 올랐다. 이후 61사단은 중국 공산당의 중앙군사위에 의해 인민해방군의 첫번째 응급조치기동 작전 부대로 확정된다. 당시 61사단의 정치위원은 장하이양(張海陽, 전 군사위원회 부주석 장전(張震)의 아들)이었고, 장쩌민이 이 곳을 친히 시찰하기도 했다. 1994년 창완취안은 육군 47 집단군(군단)의 참모장을 맡고, 1997년에서 소장(우리나라의 소장)에 오른다. 2000년 육군의 47집단군의 군단장으로 승진한다,

2002년에는 란저우군구 참모장에 올랐으며 2003년에 중장으로 승진한다. 이어 2003년에는 내륙지역을 벗어나 베이징군구의 참모장을 맡는다. 베이징군구는 베이징시, 텐진 (天津)시, 허베이(河北)성, 산시(山西)성, 네이멍구(内蒙古)자치구를 통할한다.

◆백두산서 대규모 군사훈련 지휘

이듬해인 2004년에는 선양군구 사령관에 오르게 된다. 일개 사병에서 36년만에 중국 7대군구의 한 곳인 선양군구의 사령관까지 오른 것. 선양군구는 랴오닝(遼寧)성, 지린(吉林)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3성을 관할한다. 위로 러시아, 아래로 북한을 경계•방어하는 것이 주 임무이며, 1950년대 한국전 참전 경험을 갖고 있는 최정예 인민해방군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선양군구 사령관에 오르자 마자 북한에 대한 국경방어작전권을 공안수비대로부터 넘겨받았다. 창완취안은 스스로 간부들을 데리고 실지조사를 벌였으며 변방설비가 낙후됐음을 알고, 동북3성 지도자와 의견을 교환해 러시아변방, 북한변방지역 수비를 더욱 공고히 했다. 특히 2006년에는 백두산 등지에서 대규모 군사훈련을 벌여,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비하는 게 아니냐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창완취안은 동북지역의 민족 분열주의자와 극단적 종교주의자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예상치 못한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군의 역량을 사회에까지 확대시켰다. 우선 그는 3년간의 선양군구 사령관 임기중에 주둔지가 위치해 있는 마을과 공동건설 합의서를 체결했다. 군 간부와 마을 간부간의 교차배치나 협력활동등을 통해 공산당의 기층조직 확대를 꾀했다. 이로 인해 군 간부들은 매달 하루, 매 계절당 1주일씩을 마을에 가서 일을 해야만 했다.

또한 창완취안은 군대의 조직력과 장비력을 동원해 지방경제 건설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동북지역의 노후한 공업기지를 진흥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선양군구는 그의 임기중 100만명, 수십만대의 차량을 지원했다.

이어 그는 2007년에 총장비부장이 되고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발됐고, 그 해 상장(대장)으로 승진하는 겹경사를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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