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일에 가려진 나관중 上 |
삼국지를 많이 읽은 사람은 역사 지식뿐만 아니라 병법(兵法) 처세술 등이 두루 박식하고 뛰어나 도저히 당해낼 수 없다는데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나 복숭아 꽃이 흩날리는 복숭아 나무 아래에서 형제가 되기로 맹세했다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부터 ‘삼고초려(三顧草廬)’, ‘계륵(鷄肋)’, ‘읍참마속(泣斬馬謖)’ 등의 고사성어까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삼국지의 내용은 진수가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는)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연의(演義)’는 본래 ‘좋은 뜻을 보태고 해석하고 꾸민다’는 뜻이다. 삼국지연의는 역사서 삼국지의 내용을 토대로 허구의 내용을 첨가해 어렵고 따분한 역사를 흥미진진하고 맛깔스럽게 풀이했다.
오늘 날 삼국지연의는 동양고전 문학의 대표로 꼽히며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에서까지 많은 독자를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지연의를 처음 세상에 내놓은 나관중(羅貫中)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다. 심지어 나관중의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도 있을 정도. 이제와 본명은 본(本), 호는 호해산인(湖海散人), 원(元)말 명(明)초의 인물이라는 정도의 내용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나관중의 출신 지역을 둘러싼 논란도 분분하다. 저장(浙江) 항저우(杭州), 장시(江西) 지안(吉安), 산둥(山東) 둥핑(東平), 산시(山西) 타이위안(太原)이 저마다 나관중의 고향을 자처하고 나선것. 오랜 시간의 연구와 수 많은 고증을 거쳐 나관중이 산시성 타이위안시 사람인 것은 정설(定說)로 굳어졌지만 타이위안 내 구체적 지역에 대해서는 또 저마다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관우의 고향인 산시성 윈청(運城)시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나관중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했다. 그 곳에 가면 베일에 가린 나관중을 만날 수 있을까, 취재진은 부푼 마음을 안고 발걸음을 옮겼다.
윈청시를 떠나던 날, 비가 그치고 햇빛이 ‘쨍’한 아침이었다. 윈청시로 왔던 길을 되돌아 3시간 여 달린 끝에 타이위안시 진중 치(祈)현에 도착했다. 정오를 막 지난 시각, 쾌청한 날씨의 오후 휴식시간을 만끽하려는 사람들로 길이 북적거렸다. 시골 장터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씨종사가 있다는 허완(河灣)촌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 양 옆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옥수수 밭이 펼쳐졌다. 따뜻한 초가을 햇빛과 구수한 농촌 냄새, 가을바람에 스치는 옥수수의 마른 잎사귀 소리가 정겹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드라마에서나 봄직한 ‘중국스러운’ 느낌을 간직한 허완촌. 마을을 벗어난 적이 없을 것 같은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일순간, 낯선 언어로 떠드는 취재팀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허완촌은 나씨 집성촌으로, 주민 1400여명 대부분 나씨 성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옹기종기 모인 농촌 가옥들 사이에 자리잡은 나씨 사당에 도착했다.
나씨사당 입구. |
나씨사당을 가리키는 비석. |
이정표도 안내문구도 없이, 왼쪽 담장 아래 희미하게 ‘나씨사당’이라고 새긴 비석만이 이 곳이 어디인가 설명해주고 있었다. 이마저도 없었다면 아무도 이 곳의 존재를 알 수 없을 듯했다. 여기저기 보수의 흔적이 있는 낡은 담벼락과 평범한 대문. 시공을 초월한 걸작을 남긴 이의 뿌리가 있는 곳이라 하기엔 왠지 초라해 보인다.
사실 허완촌 나씨사당이 발견되기 전까지 많은 학자들은 이 곳에서 멀지 않은 칭쉬(淸徐)현이 나관중의 고향이라는데 무게를 두었다.
나관중의 조적은 본래 쓰촨(四川)이나 당(唐)대에 이르러 선조 중 누군가가 타이위안 관료로 부임하며 칭쉬현에 터를 잡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고, 관련 주장이 나온 이후 나관중의 고향을 둘러싼 논쟁도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 곳 진중 허완촌에서 나씨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나씨 족보, 심지어 나관중이 유년시절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벼루와 나관중의 무덤까지 발견된다. 이는 곧 학계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에 걸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허완촌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나씨사당 마당에 심어진 고목. |
사당 입구를 들어서니 오른 쪽에 고목 한 그루가 서있었다. 한 자리에서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듯, 앙상한 가지만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마당에서 바라본 나씨사당. |
햇빛을 그대로 받아내는 아담한 마당을 지나 정면에 있는 사당 내부로 들어갔다. 사당 한 가운데는 나씨 선조의 붉은 색 위패가 쭉 늘어서 있다. 그 좌우 벽면은 비가 내리길 기원하는 기우도(祈雨圖)로 꾸며져 있었다.
나씨사당 내부에 모셔진 나씨 선조의 위패들. |
‘本村扶梁功德祖父羅榮貴, 祖母陳氏, 父五訓, 謙母劉氏, 己身貫中, 妻盧氏, 學盛, 妻王氏, 施銀五錢’
고증을 통해 원대에 지어진 것으로 확인된 사당의 천장 기둥에는 이런 글귀가 남아있다. 나씨 후손이 사당을 세울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己身貫中’ 네 글자를 통해 나관중이 당시 허완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는 설명이다. 외부인의 눈에는 뿌연 글자도 나관중 후손의 눈에는 뚜렷한 듯, 나씨의 후손이라고 소개한 백발의 노인이 단번에 관중의 이름을 찾아낸다.
천장대들보에 쓰여진 나관중에 대한 기록. |
나씨사당에서 ‘관중’ 두 글자를 확인한 취재팀은 다시 족보를 보관하고 있다는 허완촌 여유국으로 향했다.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좁은 골목길을 돌아 여유국에 도착해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불을 밝히지 않아 어둑어둑한 사무실 바닥에 한 눈에도 오래된 듯 보이는 커다란 천이 깔려있다. 나씨 가계도(家系圖)였다.
허완촌 여유국에서 보관중이 나씨 가계도. |
나씨 3대손부터 13대까지의 가계를 확인할 수 있는 가계도는 명대 이후 줄곧 허완촌에서 보관해왔다고 한다. 나씨 10대 선조에서 아래쪽으로 시선을 옮기다가 13대에서 눈길이 멈췄다.
十三祖 羅本 (13대조 나본). 나관중의 본명이었다.
妻盧氏(처 노씨) 사이에 학재(學財) 학원(學源) 학무(學茂) 학성(學盛) 학래(學來) 다섯 아들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연구 가치도 높은 가계도건만 어쩐 일인지 훼손이 심각했다. 여유국 측에서 엄격하게 관리하며 대외개방 불허인 귀중한 보물을 취재진에게 선뜻 내준 호의에 감사했지만 국가차원의 보호가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여유국 관계자는 가계도에 이어 우리에게 낡은 책 한권을 보여주었다. 나씨 가사(家史)를 기록한 ‘신기(神祇)’라는 족보였다.
나씨 집안 내력을 기록한 가보 신기(神祈). |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기던 중 여유국 관계자가 한 부분을 손 끝으로 가리켰다.
本祖初, 吾祖諱本, 字貫中, 流他鄕, 有鉅作
왕조 초기, 우리 선조 관중은 고향을 떠난 곳에서 걸작을 남겼다
원말 명초의 나관중이 걸작 삼국지연의를 남겼다는 내용이라고 관계자가 설명했다.
사당 천장의 기록과 가계도, 족보 마다 ‘나’와 후대가 기록한 나관중에 대한 부분이 모두 일치했다.
여기에 허완촌에서 발견된 벼루 뒷면에는 ‘湖海置, 時年十六’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호해 두 글자와 나관중의 호 ‘호해산인’이 서로 같다는 점도 나관중이 허완촌 사람이라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주장이다.
문물 관리 당국의 엄격한 보호 하에 있어 벼루는 확인을 할 수가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나관중의 또 다른 고향 칭쉬현을 상상하며 여유국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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