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론의 정치적 음모 속에 비운을 맞은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 아버지의 한을 풀 날을 준비하며 하루하루 목숨을 지켜내는 일에 몰두하고 있던 정조에게 ‘역모’의 24시간이 닥친다. 용의 턱 아래, 몸의 다른 비늘들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유일하게 나 있다는 비늘 역린은 임금의 노여움을 뜻한다. 현빈은 ‘역린’을 통해 정조의 노여움을 어떤 색깔과 형태로 표현해 내고 싶었을까. 지난 14일 서울 삼청동의 한옥카페에서 만난 현빈에게 물었다.
이야기는 현빈과 ‘역린’의 첫 느낌으로부터 시작됐다. “시나리오 때부터 정조의 영화는 아니었어요. 정재영 선배가 연기한 내시 ‘상책’ 역할, 조정석이 맡은 살수 ‘을수’ 역할도 탐이 났어요. 다른 데로 눈이 가는 내 자신을 처음 느껴 봤네요. 이 사람의 관점으로 보면 전혀 다른 영화가 되겠구나 싶은 부분에 매력을 느껴 출연을 결정했습니다”.
대왕 정조보다는 인간 이산을 염두에 두고 표현했다는 현빈. 한 나라의 왕이면서도 숨죽여 내일을 도모하는 처지가 애달프게 다가온 근원은 거기였다.
정조를 극화한 작품을 본 것이 없다는 것뿐, 현빈은 정조에게 다가서려 다양한 노력을 했다.
“일단 서적을 많이 봤고요, 마침 규장각 의궤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방송하기에 챙겨 봤는데 워낙 절제력이 강하셨던 분이라고 하더라고요. 절제라는 건 사실 연기할 때 힘들어요. 80을 감추고 20을 표현했을 때, 관객에게 20으로 보일지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로 보일지 알 수 없거든요. 배우야 감춘 80까지도 알아채 주시길 바라지만요. 그래도 ‘절제’를 중심으로 대사 처리법 등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본의 아니게 제약된 부분도 있어요. 수염이나 상투는 하관의 표정이나 이마 쪽에 지어지는 주름 등을 가리죠. 화면상에 보이게 될 부분을 활용하려 애쓰며 연기했습니다.”
디테일을 합해 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정조의 모습, ‘역린’의 주제의식을 현빈 스스로는 무엇이었을까. 현빈의 답에서 세월호 침몰 참사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염려와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읽혔다.
“누구나 바라는 군주의 모습이 ‘역린’ 속 정조가 아닐까 합니다. 주변 사람 하나하나, 국민 하나하나를 살피는 사람이자 왕이죠. 영화의 주제의식이 응집돼 있다고 할 수 있는 ‘중용’의 말, ‘정성을 다해 하나하나 해 나가면 세상은 바뀐다’는 것은 비단 (세월호 구조와 정부의 대응 등) 정치뿐 아니라 모든 상황에 적응되는 것 같아요. 쉬운 말 같지만 어려운 말이고, 시국이랑 맞물려 있고요. 저도 힘들고 스트레스 받을 때가 있죠, 그럴 때 (중용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그 순간에는 힘이 생겨요. 영화를 보고 안 보고를 떠나 이 문구는 많은 분들이 아셨으면 하는 이유입니다.”
현빈의 입을 빌어 나오는 ‘작은 일에도 정상을 다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정조의 외침이 큰 울림을 지니는 것은 중용의 덕을 가르치는 명언이어서만은 아니다. ‘역린’의 정조가 되기 위해 미세한 부분에까지 정성을 들인 현빈의 노력이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설득력을 얻었기에 해당 대사가 나오는 순간 공명이 이는 것이고, ‘저 배우도 그렇게 하나하나 준비해서 이러한 모습의 정조가 됐겠구나’ 하는 감동이 스민다.
“영화 보시는 데 방해가 된다면 독이겠죠(웃음). 제가 이렇게 생긴 걸 바꿀 수는 없는 일이고…. 그런데 제가 정조라는 인물의 영정 그림을 찾아봤어요. 어떤 사람들은 현대에서 그린 것이라고도 하는데, 제가 사진으로 봤던 그림에서는 굉장히 잘 생겼더라고요. 되레 저의 걱정은 등근육 신이었어요. 눈요깃거리로 비칠까 저어했고, 꼭 필요한 신인지 연출하신 이재규 감독님과 계속 상의했어요.”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된 정조의 등근육에 대한 얘기는 좀 길어졌다.
“제 머릿속에 편견처럼 갖고 있었던 생각, 조선시대 왕이라는 사람은 좋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고, 햇빛 안 볼 것 같은 사람이에요. (그런 왕들에게 근육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그러나 '역린' 속 정조는 다르잖아요.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근육이 가능하겠다, 매일 누군가가 죽이려 한다면 왕의 자리가 아니라 목숨을 지키기 위해 남몰래 뭔가를 하지 않았을까 싶은 거죠. 아비를 잃은 어린 이산이 성인 정조라 자라기까지의 처절한 삶이 말(대사) 없이 응축적으로 그 등에서 보여지길 바랐습니다. 다만 현빈의 등이 아니라 영화 안에 녹아들어 흘러가야 하는데 그냥 ‘몸’이 될까 걱정했고요. 운현각이라는 공간 안에서, 죽지 않기 위해 잠 못 이루는 밤에 책을 읽고 운동했다는 상상을 하며 트레이너에게 청했어요. ‘몸이 안 예뻐도 됩니다. 근육, 삐뚤삐뚤해도 됩니다. 그 당시 했을 만한 운동을 고안해 주십시오’라고요. 정조는 맨몸으로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비록 현대적 기구를 이용했지만 최대한 중력과 저의 몸무게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런 모습이 됐네요.”
21개월의 군 생활은 배우 현빈에게 무엇을 남겼을까. 어떤 에너지를 얻었고 이번 작품을 통해서는 어떻게 표출이 됐는지 궁금했다. 현빈은 “저는 그 안에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설명하기는 힘들다”면서 “관객 분들이 입대 전과 달라진 저의 모습을 발견해 주셨으면 좋겠고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변화를 읽어 주시길 바란다”고 희망했다.
무엇을 묻든 정리된 답을 내놓은 그에게서 짧지 않고 얕지 않은 사색의 흔적이 보였다. 끝으로 오늘보다 나은 배우가 되기 위해 현재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싶은지 물었다. 역시나 대답은 기대 이상의 깊이를 보였다.
“이 직업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게 경험인데, 이 직업을 함으로써 가장 차단되는 게 경험이에요, 참 아이러니하죠. 경험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바로 ‘참, 연기 못하는 애야’ 소리를 듣게 되지만 다양한 경험을 자유로이 쌓기엔 제약이 많고요.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안에서 중요한 경험들을 쌓는 ‘싸움’을 잘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제가 도태되지 않고 계속 배우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니까요. 다행히 제 주변에는 경험 폭이 더 넓은 분들과의 모임이 있어요, 거기서 여러가지 조언을 얻습니다. 좋은 모습이든, 좋지 않은 모습이든 걸러내는 건 제 몫인 것이고 함께할 수 있는 선배님, 후배님들이 제 곁에 있다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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