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과 연출을 책임진 영화 <허삼관>(제작 ㈜두타연·㈜판타지오픽쳐스, 감독 하정우)을 보고 든 첫 번째 생각이다. 영화 <용서 받지 못한 자>에서 실제를 방불케 하는 날 것 연기로 불쑥 찾아왔던 그날을 잊지 못한다. 10년 전이다. 직장인처럼 출퇴근, 쉼 없는 연기로 22여 개의 캐릭터를 선보였다. 단역까지 합하면 34편, 올해 보게 될 <암살>과 <아가씨>를 합하면 36편이다. 1978년생인 자신의 나이에 맞먹는 작품 수다.
내일모레면 관객을 만날 <허삼관>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한 편이다. 10년을 영화 <베를린>의 표종성처럼 달려오며 켜켜이 쌓아온 인맥과 연기에 대한 고민들, 음악과 미술을 비롯해 거대한 편집부터 작은 소품 하나에 대한 감각과 욕심들이 출연진의 그 어느때보다 자연스러운 연기로, 짜임새 있는 미장센으로 고스란히 응집됐다. 일테면 하정우라는 영화인이 10년간 공부한 결과인 셈인데, 성적표는 우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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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하정우에게 <허삼관> 연출은 필연이다.
다작 배우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휴지기 없이 촬영현장에 나갔지만 어느 캐릭터 하나 허투루 빚지 않았기에 연기에 대한 고민은 충밀하게 성숙됐다. 촬영장의 웃음 메이커로서 두루 잘 지내기도 하지만 함께 작업하는 스태프나 배우와 솔직한 대화로 인연의 깊이를 더하는 인물이다 보니 자연스레 하정우 패밀리(스스로는 평소 이탈리아를 빌어 파밀리에라고 말한다. 일하다 만났다고 비즈니스 관계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 그의 성향이 읽힌다)가 형성됐다. <허삼관>에 보이는 배우들, 스크린 뒤에서 재능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스태프가 그들이다.
현시대 대한민국 최고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배우 하정우는 혼자 연기 잘하길 원치 않는다.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비밀 레시피를 지니기보다 주변 사람과 나누고 함께 잘되기를 바란다. 영화인 하정우는 배우만, 감독만 부각되기를 원치 않는다. 영화의 모든 요소가 누락 없이 관객에게 전달되고 관객이 그 공을 기억해 주기를 꿈꾼다. 말하자면 하정우는 혼자만의 열 걸음이 아니라 열 사람과 함께 내딛는 한 걸음으로, ‘사람으로’ 미장센을 완성했고 <허삼관>을 세상에 내놨다.
덕분에 우리는 명배우들과 명스태프가 땀과 열정을 아끼지 않고 차린 ‘최고의 밥상’을 만나게 됐다.
서로의 속을 들여다보는 감독과의 찰떡궁합 속에 물오른 연기력으로 대한민국 영화사에 남을 캐릭터 허삼관을 만든 하정우, 그 어느 때보다 여성스러운 눈빛과 힘을 뺀 연기로 스크린을 아름답게 빛내는 하지원만의 얘기가 아니다. 종종 우리는 영화를 보다가, 자주 등장하지 않지만 중요한 배역에 연기 경험 부족한 배우가 캐스팅된 걸 보며 ‘아, 저 역에 누가 나오면 최곤데. 너무 유명해서 출연 안 하겠지?’ 아쉬워한 적 없는가. 배우가 일단 주연급이 되면 조연을 마다하거나 특별출연 혹은 우정출연을 붙이기엔 배역이 제법 큼에도 카메오를 자청하는 걸 보며 안타까워한 적 없는가. <허삼관>에서 로버트 드 니로를 연상시키는 이경영을 비롯해 김영애, 성동일, 주진모, 정만식, 조진웅, 장광, 전혜진, 김기천, 최규환, 김재화, 황보라, 김성균, 윤은혜 같은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 분량 따지지 않고 펼친 호연을 보노라면 미국영화 <오션스 일레븐>을 보며 느꼈던 부러움은 가시고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열 배가 된다. 허옥란(하지원)의 혼전 애인으로 나오는 하소용을 연기한 민무제, 신인이라고 하기엔 놀라울 정도의 파워를 뿜는 그를 포함해 모두 하정우라는 감독이 있어 가능했던 캐스팅이다.
스태프가 차린 최고의 밥상은 <허삼관>의 완성도가 대변한다. 기존의 흥행공식을 답습하는 감독이 되기보다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면서 한 편의 작품을 유려하게 마무리해 낸 감독 하정우의 힘은 그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스태프에게서 나온다. 하정우는 그간의 작업에서 탐을 내며 눈여겨봤던 실력자들과 <허삼관>을 만들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안정감 있어 더욱 돋보이는 카메라 워크, 1953년과 64년의 시대 분위기를 암울하지 않게 아련한 추억의 빛깔로 마감해 낸 의상과 세트 그리고 CG와 특수효과, 배우들의 얼굴빛에도 시대감성을 드리운 분장, 유럽 각국을 돌며 장면 전환과 대사 흐름에 맞춰 지휘하며 녹음해낸 음악, 군더더기 없이 효율적으로 착착 붙어 전환되는 편집, 부족한 안목과 글 재주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하는 스태프의 땀과 혈이 한 땀 한 땀 <허삼관>을 바느질했다. 물론 이 웰메이드 수작의 탄생을 진두지휘한 것은 감독 하정우다.
<허삼관>은 웃으며 시작해 울고 끝나는 영화다. 앞서 말한 쟁쟁한 배우들의 통통 튀는 연기와 넘치는 찰진 말맛이 큰 웃음을 주는 가운데 허삼관의 아들 삼형제와 동네 꼬마들이 ‘천연의 웃음’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어금니를 물게 되고 명치가 먹먹해지는 눈물은 믿고 보는 배우 하정우의 몫이다.
삼관이네 동네에는 개울이 흐른다. 감독 하정우의 고집으로 20억원을 들여 바닥을 다지고 물을 끌어다 채운 개천인데, <허삼관>의 휼륭한 조연이다. 빨래하는 옥란, 물장구 치는 아들 삼형제와 이를 지켜보는 허삼관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터를 제공하고 영화 전체를 따뜻하게 휘감아 안는다. 추운 겨울, 땀나게 웃고 뜨겁게 울고 싶다면 <허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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