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스페셜]후진타오는 못했던 후야오방 복권, 시진핑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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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1-23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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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혁명원로이자 정치개혁의 아이콘, 시진핑 장악력 바탕으로 완전복권 이뤄져

후야오방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사진=바이두]



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후야오방(胡耀邦, 1915~1989) 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의 복권문제는 중국 정계의 오랜 고민거리였다. 후야오방은 어린나이에 공산당에 투신했으며 대장정을 함께 한 혁명원로다. 1978년 이후 덩샤오핑(鄧小平)과 함께 개혁개방을 진두지휘한 인물이기도 하다. 1981년에는 중국 서열1위인 중공 총서기까지 올랐었다. 청렴했고 성실한 태도로 많은 공산당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후야오방은 정치개혁(민주화)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를 방관했다는 이유로 1987년 총서기직에서 불명예 퇴진당했다. 1989년 그의 사망은 톈안먼(天安門)사태로 이어지는 단초가 됐다. 비록 그가 공개적으로 정치개혁을 요구한 적은 없다고는 하지만 정치 개혁을 둘러싼 중국의 정치 현장엔 항상 그가 등장했다. 때문에 후야오방은 신중국건설의 주역이자 혁명원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개혁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존경받는 공산혁명 원로이자 정치개혁의 아이콘. 한 사람이 하기 힘든 모순된 두 배역을 소화해낸 후야오방이기에, 그는 사후에도 편안한 날을 지내지 못했다. 그의 일생을 존경해온 많은 공산당 후배들이 후야오방의 복권을 요구했지만, 그의 복권이 정치개혁에 대한 인민들의 희망을 불러오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에 좌절됐었다. 그런 그가 지난 20일 완전 복권됐다. 총서기 퇴진 이후 28년, 사망이후 26년만에 이뤄진 완벽한 복권이었다.
 

1982년 덩샤오핑(오른쪽)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사진=바이두]


◆1987년 1월16일, 그 날

34년전인 1981년 중공중앙 총서기에 오른 후야오방은 개혁개방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그가 1985년 5월 단행한 가격자율화조치는 파격적이었다. 그동안 국가가 결정하고 통제해오던 모든 농산물, 공산품, 원자재, 제품가격 등을 자율화시킨 것. 공급부족에 시달리던 중국이었기에 가격자율화는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1985년 소비자물가지수는 8%, 1986년에는 6% 상승했다. 중국 인민의 삶은 팍팍해졌다.

개혁개방과 가격자율화로 인해 중국의 모습은 하루하루가 변해갔다. 사회 전반에 변화의 분위기가 가득했다. 변혁의 기운은 인민들의 생활고와 어우러져 1986년 12월 학생시위로 터져나왔다. 허페이(合肥)과기대에서 시작된 시위는 삽시간에 베이징, 상하이로 번졌다. 베이징대 학생들은 인민일보 신문을 불태우고, 톈안먼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1987년 1월6일 개최된 정치국회의에서 덩샤오핑은 "이번 학생 시위 과정에서 후야오방 동지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며 결단력도 없어, 몇가지 문제는 그 자신이 일으킨 것과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10일 후 1월 16일 원로들이 대거 참석한 정치국 특별확대회의는 후야오방을 총서기직에서 퇴진시켰다. 당일 관영 신화통신은 "후야오방 동지가 이 회의에서 재임기간중 당의 집단지도체제 원칙을 위배, 정치원칙상의 주요문제에 관한 자신의 과오에 대해 자아비판하고 정치국에서 자신의 사임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보도했다.
 

1989년 4월에 진행됐던 후야오방 전 총서기의 장례식.[사진=바이두]


◆톈안먼사태와 장쩌민 지도부

정치국확대회의 이틀후인 1월18일 자오즈양(趙紫陽) 당시 중공 총서기 서리는 중국을 방문한 헝가리 공산당 서기에게 "후야오방은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했으며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각종 조짐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데다 지지하기까지 했다"며 "지난해 12월 민주화요구 시위가 크게 확산됨으로서 후야오방을 사임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펑전(彭真), 천윈(陳雲), 보이보(薄一波) 등 보수파들은 지속적으로 후야오방에 비판을 가했다. 덩샤오핑이 그해 5월 "후야오방 동지의 오류는 비판해야 하지만 전체당원들이 공산주의적 동지애를 발휘해 우정으로 감싸자"고 후야오방을 두둔하면서 비판은 잦아들었다.

1989년 4월15일 후야오방이 사망했다. 그해 역시 인플레이션이 혹독했으며, 인민들의 삶은 고난했다. 이중가격제를 활용한 관료들의 비리행위와 부정축재는 인민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정치개혁의 아이콘인 후야오방의 사망은 대학생들의 시위를 촉발하는 도화선이 됐다. 후야오방에 대한 추모시위는 톈안먼사태로 이어졌다. 톈안먼사태로 자오쯔양이 실각했으며 장쩌민(江澤民) 총서기 체제가 들어섰다.
 

1986년 후진타오 당시 구이저우성 서기를 소개하고 있는 후야오방 전 총서기.[사진=바이두]



◆뜻을 못이룬 후진타오 주석

톈안먼사태를 통해 권좌에 오른 장쩌민 주석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후야오방’은 금기단어였다. 하지만 2002년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가 등극하면서 후야오방 복권이 거론되기 시작한다. 이는 후야오방과 후진타오의 각별한 인연에 기인한다.

후진타오 전 주석이 1981년 중앙당교에서 연수하던 시절 룸메이트가 후야오방의 아들 후더핑(胡德平)이었다. 후더핑은 후진타오를 아버지에게 소개했고, 후야오방은 총명한 후진타오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후진타오가 1984년 장관급인 공청단 제1서기에 임명된 것은 후야오방의 작품이었다. 후야오방이 실각하던 1987년1월 중국 관료사회에 후야오방 비판릴레이가 벌어졌을때 후진타오는 끝내 비판을 하지 않았다.

후진타오는 자신의 정치적 은사인 후야오방을 복권시켜, 후야오방의 과거 지지기반을 흡수하려 했다. 후진타오는 후야오방 탄생 90주년이 되던 2005년 총서기인 자신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를 기획했다. 하지만 황쥐(黃菊), 리창춘(李長春), 뤄간(羅幹) 등 상하이방 상무위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후야오방을 기념하면 톈안먼사태는 어떡하고 자오쯔양은 어떡하느냐"는 걱정이 반대의 명분이었다. 결국 후진타오는 후야오방의 복권을 이뤄내지 못한 채 권좌에서 물러났다.
 

지난 20일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개최한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 좌담회에 시진핑 주석을 비롯한 7명의 상무위원이 모두 참석했다.[사진=신화통신]


◆자신감 넘친 시진핑이 이뤄내다

시 주석 역시 후야오방과 인연이 있다. 후야오방은 문화대혁명 직후인 1976년 공산당 인사를 총괄하는 당 조직부장을 맡아 연금 상태였던 시 주석의 부친 시중쉰(習仲勳)을 복권시켰다. 시중쉰을 광둥(廣東)성 서기로 임명한 것도, 공산당 서기처로 불러올린 것도 후야오방이었다. 시중쉰은 1987년 후야오방 실각을 결정하는 정치국회의 때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졌다. 시 주석은 평소 후더핑을 '형'이라고 부르며 조언을 구하고 있다.

지난 20일은 후야오방 탄생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탄생100주년 기념식에 과연 시진핑 주석이 참석하는지가 최대의 화제였다. 시 주석이 참석해 국가지도자의 신분으로 후야오방에 대해 재평가를 내린다면 완벽한 복권이 이뤄지는 셈이었다.

기념식에는 시 주석을 비롯한 현직 상무위원 7명이 모두 참석했다. 시 주석은 기념행사에서 "후야오방 동지는 중국 개혁·개방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며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이자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혁명가"라고 극찬했다. 이로써 완벽한 복권이 이뤄진 것.

시 주석을 비롯한 중국 지도부는 26년전 사망한 정치인 후야오방의 복권이 중국에 가져올 혼란은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 판단은 중국내 권력을 틀어쥐고 있으며 인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시 주석의 자신감에서 비롯됐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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