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원래 ‘주인’이었던 영국은 민주주의 후퇴를 얘기하며 중국을 비난하고 있고, 중국은 아랑곳하지 않고 ‘마이웨이’를 걷는 중이다.
국내 언론에서는 이 같은 현상을 대부분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1인 지배체제 강화라는 정치적인 측면으로만 해석하는 경향이 짙다.
장정아 인천대 중국학과 교수는 홍콩에 대한 중국의 압박이 심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국의 식민 시절부터 홍콩의 민주주의 기반은 취약했다고 지적한다. 장 교수는 “홍콩이 오랫동안 자유민주사회이자, 법치사회였다는 이미지는 중국반환을 앞두고 만들어진 신화”라면서 “최근 이 신화에 대한 성찰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주차이나는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보장)의 실험 속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홍콩 민주주의 현실과 그 이면의 모습들을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홍콩 1세대 정치범의 등장, 양심수의 등장…. 최근 홍콩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표현들이다.
16명의 청년들이 몇 년 전의 시위를 이유로 징역형을 받고 수감되면서 우산혁명 이후 최대 규모의 항의시위가 벌어졌다.
국내 언론은 주로 우산혁명 주도자들의 징역형에 주목했지만, 그 직전에 13명의 청년이 또 다른 시위와 관련해 무더기로 징역형을 받은 것 또한 시위를 촉발한 중요 요인이었다.
충격적이었던 점은 이미 사회봉사명령을 받아 형을 선고 받았는데 율정사(한국 법무부에 해당)가 형량이 너무 가볍다며 항소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는 원심을 뒤집고 전례 없는 무거운 실형이 대거 내려졌다.
반환 후 홍콩에서 정치적 행동으로 인한 처벌은 명백한 폭력행위를 의도적으로 주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이렇게 무거운 형벌이 내려진 적이 없다.
이번에는 정부가 즉시 감금을 요청해 이뤄진 항소심이라는 사실에 홍콩인들은 분노했다.
특히 폭력행위를 주도하지 않았다고 법원에서 인정된 이들조차 6개월에서 1년 넘게 수감되는 상황이 홍콩의 어두운 앞날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최근에는 직접 선거로 선출된 입법회(국회) 의원 중 6명이 의원 선서를 파행적으로 했다는 이유로 의원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근거 조항이 없는데도 홍콩 정부가 중국 정부에 요청한 법 해석에 따라 이뤄진 일이다. 홍콩에서 법은 더 이상 자신의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홍콩은 중국과 달리 법치가 보장되는 사회라는 사람들의 믿음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홍콩이 법치사회라는 인식은 그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홍콩이 자랑하는 법치 전통은 바로 중국이 그토록 굴욕스러워하는 영국의 홍콩 식민통치 덕분에 가능했다는 것 또한 홍콩인들이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신화’ 중 하나였다.
“중국 난민들은 철조망을 넘고 헤엄치고 달려, 법치가 보장되는 여기 홍콩에서 안전과 평화를 누리기 위해 왔다.” 홍콩의 마지막 영국 총독인 크리스 패튼이 홍콩 반환 직전에 했던 말이다.
영국은 홍콩에 대한 가장 큰 공헌으로 법치를 손꼽았고, 이에 이견을 품는 홍콩인은 없었다.
이 때문에 중국으로의 주권 반환을 앞둔 홍콩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법치 유지였다.
더군다나 홍콩은 1989년 중국의 톈안먼(天安門) 사태를 지켜보면서 ‘무법사회’ 중국에 대한 공포가 증폭됐다. 자신들이 탱크에 의해 진압되는 일이 홍콩에서 발생하지 않으려면 법치가 핵심이라고 여겼다. 홍콩인들에게 법치는 단순히 숭고한 가치가 아니라 생명을 지켜줄 ‘생존 기반’이었다.
그러나 ‘법치사회’ 홍콩은 오랫동안 견고하게 유지된 ‘현실’이 아니라 식민통치 말기에 만들어진 ‘신화’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식민지 시절 홍콩은 어떠한 의미에서도 진정한 법치사회라고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당시 홍콩의 입법기관은 사실상 ‘자문기구’에 불과했다.
1985년 간선제 도입 전까지 입법기관의 모든 의원을 정부에서 위임했다. 헌법은 총독의 절대적 권력을 강조했으며, 시민권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단지 홍콩 법치의 핵심 기능은 경제적 자유의 보장이었다.
시장의 자유를 넘어서 ‘권리’ 보장에 대한 법이 중요하다는 인식은 식민통치 말기에야 생겨났다. 그것도 중국으로의 주권 이전을 앞두고 영국에 의해 정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중·영 간의 갈등 속에서 반환 후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을 제정하면서 비로소 사법권 독립과 대법원이 주어졌다. 이는 결코 영국 치하의 홍콩인이 향유하던 것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반환 후에도 완전한 법치가 보장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가 기본법 해석 및 수정권을 갖고 있다는 점은 가장 치명적인 한계로 지적된다.
최근 의원직 박탈을 비롯해 반환 후 홍콩의 중요한 사안들은 중국정부의 법 해석을 통해 이뤄진 경우가 많다.
이처럼 홍콩은 법치사회로서의 역사가 짧고 그 법치조차 지극히 제한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콩인에게 법치사회라는 믿음은 절대적이다. 일부 학자가 “우리가 지녔던 것은 영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수준에서의 법치였을 뿐”이라고 지적하긴 하지만, 이런 인식이 널리 공유되진 않는다.
당장 중국의 위협을 홍콩 법치의 가장 큰 적으로 여기는 관념 속에서 영국식 법치가 절대적으로 옳은가에 대한 성찰이 자리 잡을 공간은 없다.
어느샌가 홍콩 법관에게 ‘애국’이라는 기준이 공개적으로 요구되기 시작하면서 중국이 홍콩의 사법독립을 훼손시키고 있다는 우려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중국과 홍콩 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몇년 전부터 홍콩 법관들에게 ‘애국할 생각이 없으면 법관을 하지 말라’는 발언을 하고 있다. 중국이 요구하는 애국은 홍콩을 지켜줄 마지막 생명줄인 법치를 위협하는 듯 보인다.
필자는 법치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누구나 당당하게 ‘홍콩은 법치가 있기에 중국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던 곳에서 자신들의 법치는 원래 취약했다는 성찰이 나오기 시작했다.
홍콩의 법치는 그저 영국통치 말년에 ‘빌려온 것’에 불과하다. 무너지고 있는 것은 법치사회라기보다 그렇게 믿어왔던 신화다. 그 믿음 자체가 환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시각이 등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대다수 홍콩인은 그동안 믿었던 법치사회 신화의 식민성과 문제점을 되짚어볼 여유가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법정에서는 ‘정부 요구’에 따른 판결이 내려지고 있다.
물리적인 폭력 사태를 주도하지 않은 젊은이들이 정치적인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줄줄이 잡혀 들어가는 상황은 그들을 ‘영웅’으로 만들고 있다. 심지어 이들에게 노벨평화상을 줘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이와 같이 급박하고 비장한 분위기 속에서 ‘소중한 식민 유산인 법치를 훼손하는 것은 중국’이라는 이분법적 대립구도는 다시 굳어지고 있다. 이 대립구도는 당분간 강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홍콩의 법치주의 신화는 깨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화가 ‘허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적’ 때문이라는 인식, 중국의 간섭이 없었다면 그 신화는 계속될 수 있었을 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성찰이 자리 잡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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