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사진 = 바다 뱃길]
때문에 동쪽 병력을 일본으로 빼돌리기가 어려웠다. 5년 동안 이어진 반란을 잠재운 이듬해 쿠빌라이가 숨을 거두었으니 사실상 추가 일본 원정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졌다. 그 동안 일본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예상되는 추가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더 이상의 충돌은 없었지만 두 차례 일본 원정이 남긴 영향은 양측 모두에게 적지 않았다.
▶ 정경분리-교역 활발
무엇보다 몽골에게 남긴 가장 큰 영향은 두 차례의 원정이 남송 접수와 함께 손에 넣은 바다 경영의 방법을 익히고 그 것을 어느 정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좋은 기회가 됐다는 점이다. 몽골은 남송 접수와 함께 그들이 지니고 있던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바다와 관련된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함께 얻었다.
그러한 해양기술과 지식은 중국의 강남사회가 오랫동안 쌓아온 것이었다. 유목민인 몽골인들에게 일본 원정은 이후 강남 사회를 발판으로 더 넓은 바다로 나가는 데 좋은 경험이 된 셈이다. 여기에서 괄목할만한 또 하나의 현상은 몽골과 일본 사이에 긴장이 계속됐지만 교역은 오히려 더 활발하게 진행됐다는 점이다.

[사진 = 신안 앞바다]

[사진 = 신안 해저 유물선]

[사진 = 해저유물 발굴(1976년)]

[사진 = 동남아 지도]
쿠빌라이 후반기인 1292년에 비교적 큰 규모로 이루어졌던 자바원정도 강력한 저항으로 실패했다. 이 원정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남중국해와 자바해 그리고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뱃길은 몽골제국의 수중에 들어왔다. 중국의 남쪽에서 필리핀과 인도차이나반도 그리고 보르네오 섬으로 둘러싸여 있는 남중국해와 연결하는 뱃길이 열렸다.
이것은 중국에서 인도와 중동 이슬람 지역에 이르는 교역 길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무슬림 상인이 개척한 길
그 뱃길을 통해 중국과 이슬람 지역을 연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동쪽의 중국 땅은 쿠빌라이가 장악하고 있었고 서쪽의 이슬람 지역은 훌레구 울루스, 즉 일한국이 장악하고 있어서 바다로 이어지는 동서 모두 몽골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닷길은 이 때 와서 다시 활발하게 연결됐다.
하지만 이 길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무슬림상인들이 개척해 놓았던 길이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지만 쿠빌라이 시대 바다교역의 중심 역할을 했던 무슬림의 바다를 통한 동진(東進) 과정을 들여다보면 그렇다.
▶ 동방진출의 출발지 바그다드

[사진 = 알 만수르 추정도]

[사진 = 티그리스강]
당시 바그다드에는 ‘평안한 수도’라는 의미의 ‘마디나 아살람’(Madinot-as-salam)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도시는 나중에 ‘하늘이 준 곳’이라는 의미의 페르시아 이름으로 바그다드로 불리게 된다. 알 만수르는 아바스 왕조의 1대 칼리프인 아불 아바스의 형으로 사실상의 왕조 창시자로 평가 받고 있다.

[사진 = 사담 후세인]
▶ ‘평화를 원하는 도시’ 바그다드

[사진 = 바그다드 주변지역]
▶ 사라센 문화 개화의 중심지

[사진 = 마르코 폴로 귀환경로]
그래서 중개무역 형태로 많은 부를 끌어 들였다. 무슬림 상인들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연안 지방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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