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미국 팝아트의 선구자 앤디 워홀은 전시장을 떠다니는 백열전구를 상상했고, 벨 연구소의 공학자 빌리 클뤼버는 백열전구가 떠다니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군용 샌드위치 포장지에 공기를 차단하고 그 안에 헬륨가스를 넣으면 부유할 수 있을 거라는 조언을 한다. 이 둘은 전시장 안을 자유롭게 부유하고 헬륨가스가 빠지면 천장에서 내려와 자연스럽게 관람자가 만질 수 있는 '은빛 구름'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샌드위치 포장지는 아니지만, 은박지로 만든 베게 크기(89cm×122cm)의 작품 50여 개가 전시장 천장에 흩어져 있다. 앤디워홀뮤지엄에서 공수해온 '은빛 구름'이다.
'은빛 구름'은 예술가와 공학자가 협업을 통해서 만들었다는 점과 관람객의 참여를 끌어냈다는 것에서 미술사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국립현대미술관(관장 바르토메우 마리)은 예술과 공학의 협업을 다룬 '예술과 기술의 실험(E.A.T.): 또 다른 시작'을 9월 16일(일)까지 서울관에서 연다.
이번 전시는 1960년대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예술가와 공학자의 협업체 'E.A.T.(Experiments in Art and Technology)'의 주요 활동을 조명한다.
E.A.T.(이하 EAT)는 예술과 기술의 실험을 의미하며, 예술가와 공학자 그리고 산업 사이에 더 나은 협력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1966년 예술가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와 로버트 휘트먼(Robert Whitman), 벨 연구소의 공학자 빌리 클뤼버(Billy Klüver)와 프레드 발트하우어(Fred Waldhauer)를 주축으로 설립된 비영리 단체다.
박덕선 학예사는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2차 세계대전이 이후 1960년대에도 오늘날처럼 기계시대의 끝이라고 얘기할 정도로 최첨단 기술이 범람하던 시대이다" 며 "지금의 우리처럼 기계에 대한 두려움과 기계에 대한 유토피아적인 환상이 함께 공존했던 시대였다"라고 전시 배경을 설명했다.
1960년대에 EAT가 주도했던 예술과 공학의 결합은 오늘날의 4차 산업혁명에서 시도되고 있는 융복합산업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전시 주제인 '또 다른 시작'는 영어의 'open-ended'를 한국어로 뜻을 담아낸 것이다.
박 학예사는 "'예술가들은 열린 결말을 두고서 작업을 하고 공학자는 결말을 예측해서 실험한다'라는 한 공학자의 말을 듣고 'open-ended'라는 전시 제목을 생각했다" 며 "EAT야말로 예술가와 과학자의 다양한 협업을 끌어내 작품활동 외에도 미술관이라는 제도적인 공간을 뛰어넘는 열린 결말로써 유효한 프로젝트들을 많이 진행했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는 총 4개의 섹션으로 구성하여 33점의 작품과 EAT의 활동과 작업 등을 담은 아카이브 100여 점이 소개됐다.
첫 번째 섹션 '협업의 시대'에서는 영역 간 경계를 허물고 작가들 간의 공동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1960년대를 돌아본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6전시실에 들어서니 입구에 로버트 브리어의 '장 팅겔리의 뉴욕 찬가에 대한 오마주'라는 비디오 작품이 걸려 있다.
움직임을 중시하는 '키네틱 아트'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 팅겔리(Jean Tinguely)는 '뉴욕찬가'라는 뉴욕의 쓰레기 처리장에서 수거해온 다양한 폐품으로 길이 7m, 높이 8m에 달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스스로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리고 증기를 내뿜다 자멸한다. 작품이 불에 타서 없어졌기 때문에 만드는 과정을 촬영한 오마주 영상 작품으로 소개됐다.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트레이서' 작품은 미술과 안무의 협업을 보여준다. 안무가는 바퀴 자국이 새겨진 의상을 입고 전자기 펄스에 따라서 회전 속도가 변하는 자전거 바퀴에 맞춰 춤을 춘다. 이 작품은 장르 간 경계를 허물고 협업을 통해서 실험적인 미술을 선보였다.
백남준의 '자석TV' 작품도 전시됐다. 백남준은 당시 벨 연구소의 공학자들과 교류하며 예술과 과학기술의 접점에서 새롭고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이 작품은 자석의 자장으로 TV 모니터의 음극선을 밀어내어 화면이 일그러지는 원리를 이용했다.
텔레비전의 이미지가 외부의 개입에 의해 변형되는 것을 보여준 것으로 전시된 작품은 1965년도 작품을 1995년도에 재제작한 버전이다.
6전시실과 7전시실 사이에는 기다란 복도가 있고, 거기에는 은박지로 만든 네모난 모양의 풍선 50여 개가 공중에 떠 있다. 앤디 워홀의 작품인 '은빛 구름'이다.
이번에 전시한 '은빛 구름'은 앤디워홀뮤지엄에서 전시 기간만 쓸 수 있는 제품을 보내온 것으로 재제작품이다.
복도 한쪽 면에는 앤디 워홀이 바닥에 누워 완성한 '은빛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진도 걸려 있다.
7전시실에는 두 번째 섹션과 세 번째 섹션이 함께 전시 됐다.
두 번째 섹션인 'E.A.T.의 설립'에서는 단체의 본격적인 협업의 결과물들을 선보였다.
한스 하케의 '아이스 테이블'은 우리가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연의 시스템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네모난 냉동장치는 공기 중의 수증기를 얼리고, 어느 정도 얼음이 쌓이게 되면 다시 녹는 것을 반복한다.
한스는 자연의 에너지를 조각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했고, EAT를 통해 공학자를 소개받아 이 작품을 만들었다.
장 뒤피의 '심장 박동 먼지'는 관람객의 심장 뛰는 소리를 작품으로 만든 인터렉티브(interactive) 결과물이다.
관람객의 심장 소리를 전기 청진기로 포착하고 그 음향을 작품의 중앙에 위치한 고무막을 통해 증폭 시켜 진동으로 먼지를 일으킨다.
이 작품은 1968년 ETA가 개최한 공모전에서 예술가와 공학자가 협업한 가장 독창적인 작품으로 1등 상을 받았다.
컴퓨터가 그린 최초의 누드인 레온 하몬과 켄 놀턴의 합작품 '지각 연구 I: 컴퓨터 누드'도 전시됐다.
이 작품은 비스듬히 누워있는 누드 사진을 컴퓨터로 스캔하여 수학 기호와 전자 부호를 12단계의 회색톤으로 이미지를 재구성했다.
우표 크기의 '달의 미술관'은 최초로 달에 착륙한 미술 작품이다.
앤디 워홀, 로버트 라우센버그, 포레스트 마이어스, 클라스 올든버그, 존 체임벌린, 데이비드 노브로스 등 6명은 작은 반도체 기판에 자신들의 드로잉을 새겨 넣은 10개의 작품을 만든 후 그 중의 한 개를 아폴로 12호에 실어 달에 보냈다.
전시장에는 작품이 아폴로 12호와 달 착륙선의 모형과 함께 전시됐다.
세 번째 섹션인 '아홉 번의 밤: 연극과 공학'은 1966년 10월 뉴욕의 69 기병대 무기고에서 선보인 퍼포먼스 작업을 영상물로 전시했다.
퍼포먼스는 수십 명의 예술가와 공학자가 9일 동안 10개의 퍼포먼스를 펼치는 이벤트였다.
퍼포먼스 중의 '오픈 소코어'는 프랭크 스텔라와 미미 카나렉이 특별 제작된 테니스 라켓으로 게임을 펼치는 퍼포먼스다.
테니스 라켓에 마이크와 소형 FM 송신기를 설치하고, 라켓으로 공을 치면 발생한 소리에 따라서 공연장의 조명이 꺼졌다. 또 공연장이 암전된 순간에는 적외선 카메라가 사람들의 움직임을 감지하여 스크린에 투사하기도 했다.
네 번째 섹션인 '확장된 상호작용'은 8전시실에서 펼쳐졌다. EAT의 활동이 예술과 과학기술의 협업을 넘어 사회 참여 프로젝트들로 확산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로봇청소기의 원형처럼 보이는 '떠다니는 것' 작품은 2m 높이의 돔 모양 입체 조형물이다.
이 작품은 분당 60cm 이하의 눈에 띄지 않는 느린 속도로 전시장 안을 돌아다니다가 장애물에 부딪히면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움직인다.
총 7기가 제작됐고 5기는 폐기 됐다. 남은 2기 중의 1기가 전시됐다. 작가는 관람객이 작품을 밀면서 감상자가 아닌 참여자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했다.
'서울 - 뉴욕 아이들 지역 보고서'작품은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로버트 휘트먼의 신작이다. 로버트 휘트먼은 EAT의 창립 멤버 중에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작가이다.
신작은 서울의 13~14살짜리 아이들 10명과 뉴욕의 아이들 10명한테 영상으로 지역보고서를 작성하게 하고, 이 아이들이 같이 화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퍼포먼스이다.
휘트먼은 과거 70년대에도 그 당시에 최첨단 기기였던 텔렉스를 가지고 아이들이 소통할 수 있는 작업을 완성했었다.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융복합산업이 더 주목받고 있다. EAT는 이미 1960년대에 융복합이라는 개념을 기반으로 여러 사람과 협업을 끌어낸 선구적인 그룹이었다. 사람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협업의 아이디어가 현대 미술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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