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대한민국서 모두 훈장 받은 조정구 선생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이한선 기자
입력 2019-12-16 09:47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고종 비서로 지난달 독립운동 인정 받아

경기 남양주에 있는 조정구 선생의 묘비. [우당교육문화재단]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인물이 등장했다.

고종의 비서 역할을 했던 조정구 선생(1860~1926)은 지난달 대한민국 훈장 애족장을 받아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인물이 됐다.

지난 6일 사무실에서 만난 이종찬 우당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은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에서 모두 훈장을 받은 것은 국가의 연속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일”이라며 “끊어진 것이 아니라 이어진 것으로 대한제국 없어져 임시정부가 생긴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이사장은 조 선생의 외손자다.

이 이사장은 "1965년 한일조약에 있는 '이미 무효'라는 조약을 을사조약 체결부터 총칼로 강제돼 '무효'라고 우리는 해석해야 하고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연속성을 주장해야 한다"며 "일본 주장대로 1948년 대힌민국 정부에서 맺은 조약부터 무효라고 하는데 그 주장을 따르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조정구 선생 [우당교육문화재단]

조 선생은 대한제국에서도 훈2등 훈장을 1906년에 비서실장 직을 잘 수행했다며 받았다. 이 이사장은 "이 훈장은 조 선생이 을사늑약에 반대해 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이사장은 지난해 집안의 문서 1만5000점을 국회도서관에 기증했고 국회도서관이 조 선생의 독립운동 자료들을 찾아 지난 3월 보내와 이를 바탕으로 8월 서훈 신청을 했다.

이번 훈장은 조 선생이 헤이그 특사 파견 시 고종의 신임장을 받고 역할을 하고, 우당과 사돈을 맺는 것을 이유로 고종의 망명을 계획하는 한편 한성임시정부의 평정원을 역임한 점 등을 인정 받아 수여됐다.

조정구 선생은 1880년 과거에 급제해 1902년 기로소(조선시대 연로한 고위 문신들 친목과 예우를 위해 설치한 관서) 비서장을 지냈다. 조 선생의 장남 조남승은 비서승으로 있으면서 항일운동세력과 연락을 취하고 차남 조남익은 고종의 시종으로 내부에서 역할을 담당했다.

1907년 헤이그 특사파견 과정에서 조정구·조남승·조남익 3부자는 비밀 채널로 이회영·이준·이동녕 등과 연락망을 유지했다. 고종의 뜻을 받아 조정구와 조남승 부자는 비밀문서를 보관하는 보관함을 관리하고 있었고 보관함에는 헤이그 특사파견 문건을 비롯해 고종의 비자금 내역이 포함돼 있었다.

조 선생은 1910년 일제가 남작 칭호를 수여하려 했지만 거부하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친 후 양주 진건면 사릉리 향리에서 노모와 같이 지냈다. 1915년 모친 별세와 장례를 전후로 서울로 이동해 원서동에 살면서 우당 이회영이 서울에 잠입해 조남승·조남익 형제와 고종망명 계획을 추진하고 있어 이 공작에 합류했다. 기밀유지를 위해 이회영의 아들 이규학과 조정구 선생 장녀 조계진(고종의 조카)과 혼사를 맺고 성혼에 대해 논의하는 구실로 고종에 접근했다. 고종 지시로 민영달에게서 5만원을 수령해 우당에 전해 중국 베이징에 있는 이시영에게 보냈고 고종의 망명처를 마련토록 하기도 했다.

당시 조정구·이회영 두 집안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 통혼을 하지 않는 관계였지만 고종 망명이라는 목표 아래 정파를 따지지 않고 협력했다.

이 이사장은 "우리 민족은 큰 목적이 있으면 뭉치는 성질이 있는데 지금은 좌우갈등 속에 뚜렷한 목표가 없는 것이 문제"라며 "노무현 대통령이 사망한 비극이 오면서 갈등이 심화됐는데 대통령에 '대'자를 붙이는 것은 통합에 나서라는 뜻으로 적폐청산도 과도하면 좋지 않다"고 말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승하하자 조정구 선생은 이회영과 사후대책을 논의했고 망명하는 길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장남 조남승이 중국으로 가 고종 망명계획 등 항일운동에 가담하고 있어 합류하기로 하고 1919년 3월 중국으로 망명한다. 1919년 4월에는 한성임시정부 평정관이 된다. 1919년부터 1925년까지는 중국 베이징에 체류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조 선생은 1924년 10월 고종 시종으로 있던 차남 조남익이 서울에서 별세하자 충격을 받았고 1925년 노약해진 몸과 자금의 한계로 귀국해 향리인 양주 진건면에서 은둔생활을 하다 1926년 3월 30일 서울 원서동 아우인 조경구 댁에서 서거했다.

이 이사장은 앞으로 고종의 바자금 관리 목록을 찾고 중국에서 고종의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증거도 더 찾을 계획이다. 고종의 비자금 관리 목록 궤짝을 맡긴 신부가 신고해 일본이 보관하고 있는 자료와 조 선생이 중국으로 떠나 고종 재산을 처분해 독립운동을 지원한 증거도 찾을 예정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