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되고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입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꿉시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취임 6년 뒤인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임원 200여 명을 모아놓고 설파한 '신경영' 선언 중 일부다. 신경영은 이날 이후 삼성의 뿌리 정신으로 자리 잡아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일궈냈다.
이 부회장의 당시 삼성에 대한 진단은 냉철했다. 글로벌 환경이 격변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류'가 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 돼야 하지만 삼성의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삼성은 8㎜ VTR을 막 개발해 시장에 내놓고 있었다. 동남아와 국내 시장에서는 성공이었지만, 미국·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질적인 측면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 부회장은 1993년 2월 주요 임원과 함께 방문한 미국 전자제품 상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구석에 놓인 제품을 보고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고 통탄했다.
이후 삼성 사내방송인 고발 영상물을 통해 '세탁기 사건'이 터졌다.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 부품이 들어맞지 않자 직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칼로 2㎜를 깎아내고 조립하는 장면이었다.
이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압축되는 신경영을 선언하는 배경이 된다. 이 회장은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며 '품질경영'을 강조했다.
삼성은 제품의 질 혁신부터 단행했다. 대표사례가 라인스톱 제도다.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하도록 했다. 이런 노력으로 전자제품의 경우 1993년의 불량률이 전년도에 비해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일 수 있었다.
1995년 3월 이뤄진 '휴대폰 화형식'도 질을 추구하기 위한 삼성전자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꼽힌다. 앞서 삼성전자는 1994년 10월 ‘애니콜’ 브랜드를 만들고 'SH-770'을 출시하며 휴대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수개월 만에 시장점유율 30%를 장악했지만 휴대폰 자체의 질은 조악했다. 무리한 제품 출시와 시장점유율 확대에만 몰두한 결과, 삼성전자 휴대폰의 불량률은 12% 가까이 치솟았다.
제품에 대한 불량률을 나중에 보고받은 이 회장은 격노했다. 1995년 1월, 이 회장은 품질에 대한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했다. 고객들에게는 새 제품으로 모두 교환해줬다. 이어 1995년 3월 9일 이 회장은 또 다른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15만대의 휴대폰을 비롯해 불량 제품들을 한데 모아 수천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불태워 없애버린 이른바 '휴대폰 화형식'을 치른 것이다. 당시 수거된 휴대폰을 돈으로 환산하면 약 150억원 어치. 이 회장은 임직원들에게도 불량 의식을 모조리 불태우라고 주문했다.
당시 이를 지켜본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훗날 "우리 가슴속에 불량에 대한 안이한 마음을 털끝만큼도 안 남기고 다 태워버렸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지금의 삼성은 거기서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취임 6년 뒤인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 호텔에서 임원 200여 명을 모아놓고 설파한 '신경영' 선언 중 일부다. 신경영은 이날 이후 삼성의 뿌리 정신으로 자리 잡아 삼성을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일궈냈다.
이 부회장의 당시 삼성에 대한 진단은 냉철했다. 글로벌 환경이 격변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일류'가 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기업이 돼야 하지만 삼성의 수준은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삼성은 8㎜ VTR을 막 개발해 시장에 내놓고 있었다. 동남아와 국내 시장에서는 성공이었지만, 미국·일본 등 선진국 시장에서는 질적인 측면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 부회장은 1993년 2월 주요 임원과 함께 방문한 미국 전자제품 상가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구석에 놓인 제품을 보고 "삼성이란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고 통탄했다.
이후 삼성 사내방송인 고발 영상물을 통해 '세탁기 사건'이 터졌다. 세탁기 뚜껑 여닫이 부분 부품이 들어맞지 않자 직원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칼로 2㎜를 깎아내고 조립하는 장면이었다.
이는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로 압축되는 신경영을 선언하는 배경이 된다. 이 회장은 "삼성은 이제 양 위주의 의식, 체질, 제도, 관행에서 벗어나 질 위주로 철저히 변해야 한다"며 '품질경영'을 강조했다.
삼성은 제품의 질 혁신부터 단행했다. 대표사례가 라인스톱 제도다. 생산현장에서 불량이 발생할 경우, 즉시 해당 생산라인의 가동을 중단하고 제조과정의 문제점을 완전히 해결한 다음 재가동하도록 했다. 이런 노력으로 전자제품의 경우 1993년의 불량률이 전년도에 비해 적게는 30%, 많게는 50%까지 줄일 수 있었다.
1995년 3월 이뤄진 '휴대폰 화형식'도 질을 추구하기 위한 삼성전자의 뼈를 깎는 노력으로 꼽힌다. 앞서 삼성전자는 1994년 10월 ‘애니콜’ 브랜드를 만들고 'SH-770'을 출시하며 휴대폰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수개월 만에 시장점유율 30%를 장악했지만 휴대폰 자체의 질은 조악했다. 무리한 제품 출시와 시장점유율 확대에만 몰두한 결과, 삼성전자 휴대폰의 불량률은 12% 가까이 치솟았다.
제품에 대한 불량률을 나중에 보고받은 이 회장은 격노했다. 1995년 1월, 이 회장은 품질에 대한 대책과 향후 계획을 점검했다. 고객들에게는 새 제품으로 모두 교환해줬다. 이어 1995년 3월 9일 이 회장은 또 다른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15만대의 휴대폰을 비롯해 불량 제품들을 한데 모아 수천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불태워 없애버린 이른바 '휴대폰 화형식'을 치른 것이다. 당시 수거된 휴대폰을 돈으로 환산하면 약 150억원 어치. 이 회장은 임직원들에게도 불량 의식을 모조리 불태우라고 주문했다.
당시 이를 지켜본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훗날 "우리 가슴속에 불량에 대한 안이한 마음을 털끝만큼도 안 남기고 다 태워버렸다. 새로운 출발이었다. 지금의 삼성은 거기서 시작됐다”고 회고했다.
조직문화도 질을 높이기 위한 구조로 개편됐다. 인사제도를 개선하고,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조직문화를 위해 노력했다. 경영의 질을 높이고자 정보인프라를 구축하고, 사업구조를 고도화시켰다. 필기시험에는 전공시험 대신 전산 기초지식과 상식, 영어 시험을 도입했다. 또
한 채용 학력제한을 철폐하는 등 열린 인사 개혁 조치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회장만의 경영 철학은 지표로 나타났다. 삼성전자는 최근 글로벌 브랜드 컨설팅 전문업체 인터브랜드(Interbrand)가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브랜드 가치가 사상 최대인 623억 달러(약 70조원)를 기록하고 순위도 처음으로 5위에 올랐다. 톱5에 미국 기업이 아닌 한국기업이 오른 것은 처음이다.
반도체 분야에서도 삼성은 글로벌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독주 중이다. 삼성의 반도체는 1984년 64메가 D램을 개발하고 1992년 이후 20년간 D램 세계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다. 2018년에는 세계시장 점유율 44.3%를 기록하기도 했다. 2001년 세계 최초 4기가 D램 개발, 세계 최초 64Gb 낸드플래시 개발(2007), 2010년 세계 최초 30나노급 4기가 D램 개발과 양산, 2012년 세계 최초 20나노급 4기가 D램 양산 등의 기술경영이 이뤄낸 성과다.
이후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투자로 삼성은 진정한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특히 위기에 앞서 미래를 준비하는 삼성의 현재 모습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송재용 서울대 교수는 본인의 책 <삼성웨이>에서 "대부분 기업 혁신은 위기가 현실화한 이후에 실현되지만, 삼성의 신경영은 위기가 도래하기 이전에 대비하는 성격이었다"며 "예견된 위기가 1990년대 중반 이후 현실화했을 때 오히려 혁신이 능동적으로 이뤄져 큰 효과를 봤다"고 설명했다.
이후 끊임없는 기술개발과 과감한 투자로 삼성은 진정한 글로벌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특히 위기에 앞서 미래를 준비하는 삼성의 현재 모습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송재용 서울대 교수는 본인의 책 <삼성웨이>에서 "대부분 기업 혁신은 위기가 현실화한 이후에 실현되지만, 삼성의 신경영은 위기가 도래하기 이전에 대비하는 성격이었다"며 "예견된 위기가 1990년대 중반 이후 현실화했을 때 오히려 혁신이 능동적으로 이뤄져 큰 효과를 봤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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