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수정의 여행 in] 하동 그곳엔 초록가을이 있다...마음아, 차 한잔 하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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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하동(경남)=기수정 문화팀 팀장
입력 2020-11-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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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리산 자락 차밭 정자에 앉아 그윽한 차 향기 빠져들다

  • 달 뜨면 섬진강변 모래밭에 누워 바람이 읊는 시 듣는다

  • '정동원'길 걷다 짚와이어 타고 허공 가르니 가슴이 뚫린다

하동 주민공정여행 놀루와에서 운영하는 생활관광 '차 마실'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 정금다원 전경.  [사진=기수정 기자]


마스크와 집콕생활에 익숙해졌다. 익숙함은 곧 답답함이 되어 심신을 괴롭혔다. 차밭에, 강변에 앉아 마시는 쾌청한 공기 한 모금이 절실해졌고, 섬진강과 차(茶)가 있는 느림의 고장, 하동(경남)으로 향했다. 그저 경관을 훑는 여행은 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머물면서 그곳의 삶을 만끽하고 싶었다. 낮에는 차밭에 자리 깔고 앉아 차를 우려 마시고, 밤에는 섬진강변에서 강바람에 일렁이는 달빛을 감상하며 일상의 번뇌를 살며시 내려놓았다. 내려놓으니, 비로소 보였다.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들어 좀처럼 보이지 않던 희망의 에너지와 앞으로 살아갈 수많은 날의 설렘이. 

◆해금 선율과 차향의 조화··· 차 마실

차(茶)를 논할 때 하동을 빼놓고 얘기할 수는 없다. 명실공히 차의 본고장이 바로 하동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나무 씨앗을 지리산 일대에 처음 심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쌍계사 차나무 시배지가 바로 하동군 화개면에 있다. 

식후엔 무조건 커피를 고집하던 이도 하동에 오면 가랑비에 옷 젖듯 '차의 향기'에 서서히 빠져들 것이다. 하동에서 차는 일상이자, 문화란 얘기다. 대를 이어 차를 재배하는 농가가 많고 그만큼 차 문화가 깊이 뿌리내렸다. 쌀쌀해도 좋았다. 차밭에 앉아 그윽한 차향을 한 번 맡고, 쌉싸름한 차의 맛을 한 번 보는 그 시간은 '힐링' 자체였으니.

하동의 차 문화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어서 현지인이 운영하는 생활 관광 프로그램 ‘하동 차 마실’에 참여했다. 

여기서 잠깐, 생활 관광에 대해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생활 관광은 각 지역만이 가진 고유한 문화, 지역주민들의 일상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를 결합해 '현지인다움'과 '지역다움'을 체험할 수 있는 여행 콘텐츠다. 한국관광공사는 이 관광 콘텐츠를 홍보해 지역관광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럼 다시 차 이야기. 하동 차마실은 정기 프로그램과 개별 프로그램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풍광 좋기로 유명한 정금다원까지 천천히 걷기로 했다. 고즈넉한 마을, 좁다란 길을 오르는 동안 대봉(大峯)감과 참다래 등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이곳에는 대봉 와이너리까지 있을 정도로 감이 많이 난다고 한다. 

드디어 차밭에 다다랐다. 드넓게 펼쳐진 차밭 위에 정자가 마련돼 있었다. 정자에 오르니 초록빛 세상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전남 보성이나 강진, 제주에서 보던 풍광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 지류가 감싸안은 차밭은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포근해 보였다.

작은 차밭이 하나둘 모여 완성된 하동 차밭 전체는 잘 정돈된 인위적인 느낌이 아니라서 오히려 더 정겹게 다가왔다.

정자 밑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다기를 정돈했다. 오래전부터 하동 찻잎 덖는 기술은 무척 훌륭하다고 들었기에 기대감은 더 컸다. 다관에 찻잎을 넣고 천천히 물을 붓고 기다렸다. 차가 우러나는 동안 해금의 선율이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차밭에 앉아 따스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해금 소리가 더해지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스며들었다. 녹색빛 풍광을 보며 연둣빛 차 한 모금을 머금는 그 순간이 참으로 행복했다. 혀끝을 감싸는 따스한 차의 맛은 마음마저 정화하는 듯했다. 모든 순간이 좋았다. 날은 적당했고, 차 맛은 은은했으며, 자연을 감싸는 해금의 선율은 감미로웠으니까. 
 

섬진강 백사장에서 펼쳐지는 '섬진강 달마중' 프로그램.  [사진=기수정 기자]

◆잠든 감성 깨우기··· 섬진강 달마중

어스름 짙어 오는 그 시간, 우리는 섬진강변으로 발길을 옮겼다. 악양면 평사리공원 앞 섬진강 백사장에 '섬진강 달마중' 무대가 펼쳐졌다. 휘영청 달 밝은 밤에도 강가는 캄캄했고, 바람은 매서웠다. 등불 하나를 손에 들고 달빛 머금은 모래밭으로 저벅저벅 걸어 내려갔다. 동행한 가이드가 "고운 모래 촉감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맨발로 걸어도 좋다"고 귀띔했지만, 따라하지는 않았다. 

백사장 산책을 마친 후 인공 달을 중심으로 띄엄띄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니, 누웠다. 온몸을 때리는 거센 바람 소리조차 낭만으로 다가왔다. 

가야금 병창과 시 낭송이 연이어 펼쳐졌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 총총히 빛나는 별과 환하게 웃는 달을 바라보며 가만히 귀 기울이는 이 시간, 강바람을 타고 흘러드는 아름다운 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각박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의 심신을 치유했고, 잠들었던 감성을 깨웠다. 

'우리 가족, 오래도록 행복하길···.' 종이배에 소원을 적어 섬진강에 띄웠다. 환경보호 차원에서 종이배는 수거했지만, 간절한 소원(마음)은 섬진강 물길 따라 서서히 흘러갔다. 

섬진강 달마중은 정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더없이 좋지만, 여행자라면 키트를 대여해 나만의 달마중을 경험해도 무방하다. 등불부터 접이식 테이블, 블루투스 스피커, 미니 달 조명, 돗자리, 시집 등이 포함된 키트를 받아들고 우리만의 섬진강 달마중을 떠날 수 있다.
 

'하동 짚와이어' 타고 하강하기 직전 여행객의 모습.  [사진=기수정 기자]

◆드디어 날다, 집와이어 타고

슬로시티 하동에 섬진강과 평사리 들판, 녹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 하동은 그야말로 '핫'하다. 트로트 신동 정동원 길이 있고, 익스트림 액티비티 '집와이어(Zip Wire)'가 있는 덕이다.

하동여행 첫날에 만끽한 '낭만'의 시간에 정점을 찍기로 했다. '집와이어'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금남면의 '하동 짚와이어'는 예약조차 하기 힘들다. 최근 배우 이시언과 개그우먼 박나래가 TV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에서 집와이어를 탄 것이 화제가 되면서 많은 이가 찾는다고 한다.

'아찔'한 집와이어를 타기 위해선 해발 849m의 금오산 정상까지 올라야 한다. 여행기자 7년 차지만 이런 극한의 액티비티는 한 번도 도전한 적이 없었다. 입구까지 갔다 돌아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결심을 굳히고 당당하게 매표소로 걸어 들어갔다. "체중을 재야 한다"는 소리에 그냥 포기할까도 했지만, 그래도 이왕 마음먹었으니 도전해 보기로 했다. 부끄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체중을 잰 후 체중에 맞는 장비를 받아 차량에 탑승했다. 

하동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금오산 정상, 집와이어 탑승 장소까지 차량으로 쉬지 않고 20분을 달려 도착했다.

아시아 최장인 3186m 길이를 자랑하는 이 집와이어를 타면 매표소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하강한다고 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고, 가슴은 쿵쾅거렸다.

금오산 정상에서 출발해 산 아래 매표소까지 걸리는 시간은 5분. 시속 100㎞를 넘는 속도에 정신이 아찔했지만, 이내 수려한 풍광을 눈에 담고 사진까지 찍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타길 잘했다." 금오산 정상까지 가는 케이블카도 건설 중이라고 하니, 내년께면 더 쉽게 집와이어를 탈 수 있을 것이다. 그때 꼭 다시 오리라. 

하동에는 이외에도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넘쳐난다.

7.2㎞ 길이의 '정동원 길'과 전어로 이름난 진교면의 술상마을 '며느리 전어 길'은 이맘때 걷기 좋은 길이다. 특히 정동원 길은 최연소 인물 지정 길이라 기네스북에도 등재될 예정이란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자주 등장하는 악양면의 스타웨이 하동(스카이워크)과 소설 '토지' 무대인 평사리 들판, 소나무 울창한 하동 송림공원도 천천히 둘러보기 좋은 하동의 명소다. 

그날의 하동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남도 500리 길을 따라 고운 물길이 유유히 흘렀고, 초록빛 차밭과 황금 들판이 햇살에 일렁였다. 따스한 녹차 한 잔에 코로나19 장기화에 지칠 대로 지친 심신을 위로받았고,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해금의 선율에 무장해제됐던 그날은 진한 여운으로 남았다. 그래, 그날을 생각하며 힘겨운 일상을 버텨내기로 한다. 
 

정금다원 정자에 오른 여행객이 하동 주민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담소를 즐기고 있다. [사진=기수정 기자]

하동의 차밭[사진=기수정 기자]

섬진강 달마중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등불과 책, 테이블, 블루투스 스피커, 담요 등이 담긴 키트를 대여해 준다. [사진=기수정 기자]

섬진강변, 달빛 속에서 듣는 전통 가락이 낭만을 더한다. [사진=기수정 기자]

섬진강 달마중 말미에는 거대한 달 모형 앞에서 이색 사진을 찍는 시간도 주어진다. [사진=기수정 기자]

하동 스타웨이(스카이웨이)에서 보는 하동의 전경은 무척 아름답다. [사진=기수정 기자]

나뭇가지에 매달린 대봉(감)이 탐스럽다. [사진=기수정 기자]

하동 송림공원[사진=기수정 기자]

하동 송림공원에는 걷다가 잠시 쉬어가기 좋은 벤치도 곳곳에 마련됐다. [사진=기수정 기자]

짚와이어를 타고 신나게 내려가는 여행객. [사진=기수정 기자]

'하동 짚와이어' 측 사진작가가 이용객이 내려오는 모습을 촬영해준다. [사진=하동 짚와이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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