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을 다시본다> 13억의 리더십 '공산당' 건당위업의 주역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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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6-30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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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최헌규 기자) “중국 역사상 수천년만에 처음으로 인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웠다.”

신중국을 세운 공산당의 위업을 평가하는 말이다. 중국인들은 또 “마오쩌둥(毛擇動)은 건당과 건국의 기초를 닦은 영웅이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세계 강대국으로 만든 위인”이라고 떠받든다.

90돌을 맞은 중국 공산당은 봉건잔재와 제국주의, 국민당을 몰아낸 ‘중국혁명’의 견인차였다. 공산주의자 마오는 바로 그 혁명의 주역 중 주역이다. 창당(건당)과 1934년 대장정, 1949년 건국 등 역사의 중심에는 늘 마오가 있었다.

◆'과오3, 공7의 지도자' 마오쩌둥

마오는 1893년 후난성 사오산(韶山)에서 태어났다. 1920년 진독수의 권유로 창사 당지부 창건을 주도하고, 1921년7월 상하이 1대(1大 공산당 1차전당대회) 대표 13명중 한명으로 참가한다. 3대때 처음 중앙위원이 됐고 34년 대장정에 참가했으며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성 준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했다.


마오는 토지개혁과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을 통해 공산 혁명을 성공시켰다. 부패한 국민당과 인민들의 절대적 지지 덕에 열세를 딛고 1946년부터 치러진 장개석 국민당과의 내전을 승리로 이끌고 천하를 공산당의 수중에 넣는다.

후진타오(胡錦濤) 총서기겸 국가주석은 마오 탄생 110주년을 맞아 ‘맑스주의 애국 영웅으로 인민의 운명을 개변시킨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라고 마오를 평가했다.

하지만 마오에게도 결점은 있었다. 공산당이 대주주인‘중국주식회사(중화인민공화국)’건국에는 성공했으나 관리에 허점을 드러냈다. 1950년대 대약진 실패, 이념과 실용파의 대립, 1960년대 문혁으로 중국은 혼란의 늪에 빠졌다.

중국에 ’나라 세우는 것보다 지키는게 어렵다(打江山易,守江山难)’는 말이 있다. 마오가 애독했던 자치통감에도 수성이 창업보다 어렵다(创业易守成难)는 말이 있는데 정작 마오는 이를 실천하지 못했다.

마오가 못 이룬 수성과 번영의 꿈은 2세대 지도자 덩샤오핑의 손에서 이뤄진다.

◆인민의 마음에 영생하는 덩샤오핑
마오사망후 집권한 덩샤오핑은 11기6중전(81년 6월)에서 ‘마오의 과오는 3이다. 7개의 공을 잊지말자’고 규정했다. 이는 마오가 만년(1967년~1976년 사망때까지)에 범한 문혁의 과오에 대해 시비하지 말고 개혁개방(1978년)과 경제발전에 매진하자는 당부였다.


덩샤오핑은 '사회주의의 중국사막'에 시장경제라는 꽃을 피운 세기의 ‘혁명가’였다.
덩은 마오가 일궈놓은 건당과 건국의 틀 위에다 일당독재 중국 공산당과 사회주의가 영속할수 있는 책략을 제시했다.

지난 1978년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이 선포한 개혁개방 선언은 중국 현대사에서 90년전 공산당 창당에 이어 또 한번 중국 천지를 개벽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개혁개방을 이끌어낸 덩의 이론은 생산력 향상과 전체 국력향상, 인민생활수준의 향상, 사회주의 현대화로 요약된다.

개혁개방과 사회의주의 현대화로 빛나는 덩의 업적은 90년 공산당사에서 신중국 건국 만큼이나 눈부신 위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지난 1946년 장개석 국민당의 우세속에 국공내전이 한창일 때만해도 미국은 마오의 공산당을 100년이 가도 별 볼일없을 정치 집단으로 과소평가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미국의 이런 정세인식은 엄청난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주 베이징 서방 외교관 한명은 덩샤오핑을 20세기 세계의 위인중 한명으로 꼽았다. 30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 그렇게 많은 사람(13억명)을 이끌고 곤궁을 빠져나간 것은 그 자체로서 기적이라는 것이다.


덩샤오핑의 지혜와 통찰력 덕분에 중국은 사회주의 현대화에 큰 진전을 이뤘다. 인민들은 기아와 빈궁에서 벗어났고 나라는 지구촌의 슈파파워로 부상중이다. 세계각국의 정치 집단들은 지금 서로 중국 공산당과 친구가 되려고 야단이다.

4세대 후 총서기는 덩 탄생 100주년때 "덩동지는 중국인의 심중에 영생한다"고 칭송했다.

◆수성을 책임진 후대 지도자들
공산당 정권의 창업과 수성작업은 마오와 덩에 이어 각각 3 ,4세대 지도부인 장쩌민과 후진타오 총서기로 이어졌다. 덩을 이은 장쩌민은 3개 대표이론(선진생산력 선진문화 광범위한 인민이익대표)을 통해 민영기업가와 지식인의 입당을 허용하는 또하나의 혁명적 조치를 취한다.

이로써 공산당의 계급기초는 노동자 농민에서 ‘자본가’로 확대됐다. 공산당 영도(리더십)의 외연이 넓어진 것은 물론 통치기반도 그만큼 강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산당‘90주년 잔치’를 주관하게된 후진타오 현 총서기는 당의 영속을 위한 새로운 가치로 이런웨이번(以人僞本)과 허세(和諧 조화)사회를 축으로 하는 과학적 발전관을 제시했다. 과학적 발전관은 맑스 레닌 마오사상, 덩 이론, 장쩌민 3개대표론에 이어 2007년 당 17대에서 공산당 당장에 삽입됐다.

창당 90돌을 맞은 중국 공산당은 지금 이 과학적 발전관에 의거, 균형과 공평성을 담보해내고 지속 가능한 성장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매진하고 있다. 이것들은 모두 ‘수성’을 위한 통치철학으로 공산당 영구집권을 겨냥한 방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중국공산당의 주요 연표

1893년 12월 26일 마오쩌둥 후난성 사오산(韶山) 출생
1904년 8월 22일 덩샤오핑 쓰촨 광안현 출생
1921년 7월 1일 공산당 창당
1921년 7월 23일 제1대(공산당 1차전국대표대회 상하이 당원57명)
1934년 10월 대정정 시작
1935년 1월 구이저우(貴州) 준이(遵義)회의. 마오쩌둥 당권장악
1945년 8월 마오쩌둥 장개석 총칭 평화회담. 내전종식
1946년 국민당의 약속 파기로 국공내전 개시
1947년 공산당 압도적 열세를 딛고 전세 만회
1949년 10월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56년 1.5규획(1차5개년계획 1956~1960년)시작
1958년 대약진운동 인민공사설립(경제실패)
1967년 1월 반마오파(류사오치 덩샤오핑) 제거. 문혁 신호탄
1971년 10월 중국 UN복귀
1976년 9월 마오쩌둥 사망. 문혁 종말
1978년 12월 제 11대3 중전 개혁개방선언
1992년 1월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講話). 개혁개방독려
2002년 11월 제 16대 장쩌민 3개대표론 당장 삽입. 자본가입당 허용
2007년 제 17대 후진타오 과학적발전관 당장 삽입
2011년 7월 공산당 창당 90주년 (당원 8026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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