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 25 후베이성편>2-1. 천하통일 꿈꾸던 손권…한폭의 수채화로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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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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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기행 25 오왕고도
후베이성편 2, 손권의 야망과 이교 - 어저우, 자위

오왕 손권의 정원인 수원 전경. 노란 대나무 숲을 배경으로 누각과 기암괴석, 그리고 연못 등 아기자기한 멋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강남 조경 양식이다.
(아주경제 윤용환 기자)어저우(鄂州)는 오나라의 수도로 손권(孫權)의 땅이다. 손권의 자는 중모(仲謀), 시호는 대황제(大皇帝)다.

손권은 야망이 대단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생김새도 전형적인 무골형으로 입이 큰 각진 네모얼굴과 구레나룻에 부리부리한 눈에는 생기가 넘쳤다고 전해진다. 삼국연의에는 ‘푸른 눈에 자줏빛 구레나룻(벽안자염 碧眼紫髥)’라고 기록돼 있다. 일부에서는 백인 혼혈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손권은 적벽대전 승리 후 늘어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당시 건업(建業, 현재 南京)에서 지금의 어저우로 도읍을 옮겼다.

오나라 당시 지명은 무창(武昌)으로 ‘무로써 나라를 다스려 흥하게 한다’는 의미의 이무이창(以武而昌)에서 따왔다고 한다.

◇손권의 휴식처 피서궁

당시의 성은 대부분 토성으로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오왕 손권의 피서궁(避暑宫)은 그 자리에 새로운 건물로 복원돼 지금까지 남아있다. 손권의 피서궁은 창장(長江, 양쯔강)을 끼고 해발 170여m 높이의 서산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공원으로 조성돼 시민들도 많이 찾고 있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생각보다 오르기가 쉽지 않다.

피서궁은 오왕 손권이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정사를 보던 곳이다. 당시 목조건물은 다 소실되고 후대에 복원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공원 입구에서 피서궁이 있는 정상까지 족히 한 시간은 걸린다.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정상에 오르면 맨 먼저 의정전(議政殿)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손권과 신하들이 한여름 무더위를 피해 정사를 살피던 곳이다.

무창이라는 지명이 유래됐던 이무이창(以武而昌)이라는 정면 현판 아래 용과 봉황 그림과 함께 오왕 손권의 왕좌가 옛 모습 그대로 복원돼 있다. 양옆에는 손권이 왕위에 즉위하면서 하늘에 제를 올리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의정전을 돌아서면 독서당(讀書堂) 건물이 나온다. 이곳은 손권이 개인적인 사색이나 독서를 하던 곳으로 피서지답게 서늘한 기운이 감돈다. 벽면에는 손견과 손책 그리고 손권으로 이어지는 오나라 왕가의 가계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목조로 지은 옛 건물들은 세월의 풍파속에 모두 사라졌다. 현재 건물은 흰개미들이 워낙 기승이라 아예 시멘트로 지었다고 한다. (아무리 피해가 심하다고 하지만 역사적 고증 없이 시멘트로 지었다는 이들의 편한 생각이 쉽게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그 뒤로 연회를 즐기던 피서궁이 자리 잡고 있다. 손권의 왕좌를 중심으로 연회석이 배치돼 있다. 특이한 것은 우리나라의 전통악기인 편경과 비슷한 동종이라는 악기도 같이 보존돼 있다. 당시 원형 그대로 발굴된 진품은 박물관으로 옮기고 복제품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 전문가들은 서양의 8음계보다 앞선 악기라며 자랑이 대단하다. 안내원들이 상주하며 관광객들에게 연주도 들려준다. 의외로 은은하고 청아한 소리가 평화로운 주변 경관과 어우러져 아름답게 울려 퍼진다.

20여m만 오르면 5층 누각 무창루(武昌樓)가 나온다. 원래는 봉화대가 있던 자리였다. 세월에 따라 모양이 변해오다 2003년 지금의 화려한 누각으로 변신했다. 아랫기단 높이가 옛 봉화대 높이다.

서산 정상의 높이는 해발 170m 남짓하지만 주변지형이 낮아 사방으로 창장과 어저우 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쉽게도 무창루 곳곳에 낙서투성이다. 허술한 관리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다시 입구 쪽으로 50여m를 내려오면 손권이 거닐던 정원인 수원(秀園)이 나온다. 중국 강남지역 정원의 특색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다.

북방식 정원이 자연 그대로의 멋을 살려 크고 웅장한 미를 자랑한다면, 강남 양식은 다양한 조각 등 인공을 가미해 아기자기한 맛을 살렸다. 대나무와 갖가지 꽃나무를 배경으로 한 누각과 연못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져 있다. 노란색 대나무가 이색적이다.

춘절(春節 설날)에는 소원을 빌기 위해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연못을 끼고 100여m의 나무회랑을 따라 위쪽으로 오르면 마치 영화 와호장룡(臥虎藏龍)의 한 장면 같은 대나무 숲이 펼쳐진다. 청아한 바람소리와 대숲을 스치는 청량한 바람에 가슴이 탁 트인다.

손권이 삼국통일 대업이라는 호승심에 칼로 내려쳐 잘라진 바위. 후대 사람들은 바위가 3분의 1만 쓰러져 손권이 오나라만 차지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대나무 숲을 뒤로하고 언덕을 오르면 오왕시검석(吳王試劍石)이 눈에 들어온다. 어저우로 도읍을 옮긴 손권이 삼국통일 대업이라는 호승심을 품고 보검으로 바위를 내려치면서 이 바위가 쪼개지면 천하를 거머쥘 것이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쪼개진 바위는 3분의 2는 그대로 서있고 3분의 1만 쓰러졌다. 후대 사람들은 쓰러진 바위의 모습을 보고 손권이 천하의 3분의 1인 오나라밖에 차지하지 못했다며 이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 뒤로는 비검석(比劍石)가 나온다. 손권을 만난 유비가 이곳에 올라 “내가 이 돌을 자르면 적벽대전에서 승리할 것”이라며 이 바위를 가로로 잘랐다고 한다. 그 후 이 말을 들은 손권은 “오나라가 주축이 돼 조조군을 물리쳤는데 유비가 감히 오나라를 무시하느냐”며 이 돌을 다시 세로로 잘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비검석에는 가로와 세로 십자모양의 칼자국이 깊이 파인 채 남아있다.

바로 위 정상에는 그 후 유비와 사이가 벌어진 손권이 촉나라를 경계하기 위해 지었다는 촉망정(蜀望亭)이 자리를 잡고 있다.

◇오왕고도의 새얼굴 손권광장

어저우는 오나라의 수도답게 시민들도 손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최근 들어 대대적인 오왕고도(吳王古都)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그 첫 번째 공사가 창장을 따라 조성되고 있는 수변공원이다. 손권광장은 20m의 손권 동상을 중심으로 강변을 따라 2km의 공원이 조성돼 있다.

손권광장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돌섬 위로 우뚝 서 있는 장강의 첫 번째 누각인 관음정(觀音亭)이 눈에 들어온다.

손권이 처음 어저우를 방문했을 때 관음정이 들어서 있는 돌섬에 용이 꿈틀거리고 멀리 피서정이 있는 서산에는 봉황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보여 이곳은 왕이 머무를 곳이라며 도읍지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수변공원을 중심으로 지금도 2단계 공사가 한창이다. 앞으로 3~4년 후에는 서산의 피서정과 수변공원, 그리고 오나라 박물관 등을 묶은 새로운 삼국지 관광 상품을 오픈할 것이라고 한다.

'오왕고도' 어저우 성이 있던 곳에 세워진 오왕성유지 기념물. 당시 성은 토성이라 모두 사라지고 해자로 사용하던 호수 남호만 지금도 남아 있다.
어저우 고성 흔적은 도심의 상업지구 가운데 오왕성유지(吳王城遺止)라는 기념물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당시는 토성이라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대신 당시 방어를 위해 창장과 연결해 해자로 사용됐던 호수 난후(南湖)가 유일하게 남아있어 시민들의 유용한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다.

◇절세미인 이교자매의 안식처

어저우에서 약 1시간 거리인 자위(嘉魚)시는 피비린내 나는 적벽대전(赤壁大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절세미인, 오왕 손권의 형수인 대교와 대장군 주유의 부인 소교 자매가 살았던 곳이다.

안후이(安徽)성이 고향인 대교와 소교 자매는 어릴 때 이곳으로 이주해와 생활했다고 한다. 이후 언니 대교는 오왕 손권의 형 손책에게, 동생 소교는 명장 주유에게 시집을 갔다.

그러나 미인박명이라고 했던가 두 미인의 운명은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언니 대교는 시집간 지 1년 만에 남편 손책이 자객의 손에 불의의 죽음을 당해 평생을 과부로 살았다. 동생 소교도 적벽대전 승리 후 남편 주유가 병사해 여생을 홀로 살았다.

수화정(漱花亭)은 죽은 주유가 꿈속에 소교를 데리고 온 곳에 지은 정자로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교는 손책이 죽은 후 불교에 귀의하려 했으나 주변의 만류로 정수정(靜修亭)이라는 사당을 지어 손책의 넋을 위로하며 지냈다.

영화 적벽대전에서도 나왔듯이 조조가 소교에게 흑심을 품고 전쟁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실제 이곳에는 우연히 소교를 만난 주유와 조조가 동시에 마음을 두었으나, 소교는 결국 주유를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연의에도 호색한인 조조가 ‘동작대(銅雀臺)라는 궁전을 짓고 이교자매를 노리개 삼아 평생을 즐겼으면 소원이 없겠다’며 오나라를 공격했다고 전한다.

제갈량도 오왕 손권에 연합군 제의를 하면서 조조가 이교를 탐한다는 미인계(美人計)를 이용한다. 이에 격분한 소교의 남편 주유가 결사 항전을 주장하며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당시대의 유명한 시인 두목(杜牧)의 시 적벽(赤壁)에서도 은근히 호색한 조조를 비꼬고 있다.

折戟沈沙鐵未銷(절극심사철미소) 부러진 창이 모래에 묻혔으나 철은 아직 녹슬지 않았는데,
自將磨洗認前朝(자장마세임전조) 내가 그것을 갈고 닦아보니 전대의 역사를 알겠구나.
東風不興周郞便(동풍불여주랑편) 동풍이 주랑을 편들지 않았다면,
銅雀春深銷二喬(동작춘심쇄이교) 동작대 봄 깊은데 이교가 갇혔겠지.

영화 적벽대전의 내용도 마냥 허구는 아닌가 보다.

자위에 있는 절세미인 대교와 소교 테마 공원. 10여m의 백색 이교 동상 뒤로 5층 누각 쌍봉루가 보인다.
현재는 10여m의 백색 이교자매 동상을 중심으로 호수 주변에 대교와 소교를 테마로 한 공원을 조성해 시민들의 문화시설로 이용하고 있다.

대표적인 누각은 20여m 높이의 쌍봉루(雙鳳樓)다. 붉은 색의 5층 누각으로 대교와 소교가 처녀시절 살았던 곳을 기념해 후대 사람들이 세웠다고 한다. 쌍봉루는 자매의 미모가 마치 봉황과 같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다.

누각 앞 호수 매해호(梅海湖)에 홀로 떠있는 도화도(桃花島)에 걸치는 석양이 장관이다. 바다에서 바라보는 석양을 호수에서 바라볼 수 있다니 그 넓이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호수 주변 산책로를 따라 중간 중간에 적벽대전 당시 상황을 재현해 놓은 조각들이 자리 잡고 있다. 주유와 제갈량, 그리고 노숙이 모여 작전을 논의했던 곳에도 간단한 설명과 함께 조각상을 설치해 놓았다.

이밖에도 적토마를 탄 관우의 모습, 봉황, 승천하는 용 등 쉽게 접하기 힘든 등공예 작품들도 만날 수 있다. 밤에는 오색찬란한 조명으로 공원 전체를 밝혀 야경을 즐기는 시민들의 휴식처로 꾸며 놓았다. 가벼운 산책이나 운동을 즐기는 시민들이 많이 찾고 있다.
이교 공원 산책로에 있는 제갈공명과 주유, 그리고 노숙이 작전회의를 하는 동상. 적벽대전 당시 실제 이곳에서 작전회의가 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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