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 기행 26 후베이성편> 3-1. 영웅은 간데없고…赤壁 두 글자만 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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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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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삼국지 기행 - 26 츠비시 삼국적벽고전장
3 - 창장의 피바람 - 적벽대전

츠비시가 의욕적으로 시작한 삼국지 관광상품 개발 사업의 첫 번째 작품인 테마파크 삼국적벽고전장. 장쩌민 전 주석이 현판 글씨를 직접 써 줄 정도로 중국 정부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주경제 윤용환 기자)삼국지의 하이라이트는 적벽대전(赤壁大戰)이다.

강북(江北)을 평정한 조조는 눈엣가시 같은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을 치기 위해 강남으로 군사를 몰아친다. 당시 강남의 실권자는 손권이었다. 손견(孫堅)의 둘째 아들로 형 손책(孫策)이 죽자 그 뒤를 이어 동오(東吳)를 다스리고 있었다. 조조는 이번 원정으로 대의명분을 내세운 유비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손권을 동시에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신야현(新野懸)에 몸을 피하고 있던 유비는 군사 제갈량을 손권에게 보내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연합을 제의한다. 화친을 주장하는 신하들의 목소리에 주저하던 손권은 제갈량의 세치 혀에 탁자 모서리를 자르며 결사항전을 결심한다. 마침내 전쟁의 서막이 오른다.

적벽(赤壁)은 당시 손권과 유비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던 장소다. 대부분은 적벽이 주 전쟁터로 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적벽은 손권의 오와 유비군의 진영이다. 주 전쟁터는 적벽의 하류인 훙후(洪湖)시 오림(烏林)이다.

적벽대전의 중심인 츠비(赤壁) 시는 지금 삼국지를 주제로 한 관광 상품 개발 사업이 한창이다. 그 첫 번째 작품이 테마공원 삼국적벽고전장(三國赤壁古戰場)이다. 넓이가 무려 300만평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대공사다.

일단계 공사가 완공돼 지난해 5월 현재의 삼국적벽고전장을 개장했다. 주변의 숙박시설뿐만 아니라, 음식점 등 모든 편의시설도 당시의 성곽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2007년 장쩌민 전 주석이 방문해 삼국적벽고전장이라는 글씨를 써줄 정도로 중국 정부도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표적인 숙박시설인 츠비호텔은 제갈량의 팔괘진(八卦陣)을 기본으로 설계돼 있다. 복도가 마치 미로처럼 구성돼 있어 방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아침 안개에 쌓인 삼국적벽고전장 전경.성벽과 건물들이 삼국지 당시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총규모는 300만평으로 지금도 2차 공사가 한창 진행 이다.
삼국적벽고전장은 전체시설을 한번 둘러보는 데만 족히 4~5시간은 걸릴 정도로 엄청난 규모를 자랑한다.

삼국적벽고전장이라고 쓰여 있는 웅장한 정문을 지나면 용과 봉황의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신무대(神武臺)가 나온다. 이곳은 오의 명장 주유가 군사를 훈련시키던 곳으로 거대한 방패모양의 조형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그 뒤로는 적벽광장이 조성돼 있다. 이곳은 주로 공연이 펼쳐지는 장소다. 저녁에는 적벽대전을 재현한 화려한 불꽃놀이와 레이저쇼 공연과 무술 시범, 그리고 유비와 손권 여동생의 결혼을 코믹하게 각색한 연극 등으로 관광객들에게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관람코스를 따라 중간 중간에 삼국지 당시의 거리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가게 이름도 소교두부, 방통서점, 주유주점, 제갈공명사진점 등 삼국지 내용을 테마로 구성돼 있다.

이곳 소수 민족인 토후족 특산품 등 기념품을 파는 곳도 좋은 눈요기가 된다. 가격표가 붙어있지만 바가지요금이다. 일단 절반까지 깎아보는 것이 기본이다.

삼국적벽고전장 내부 성의 구조는 앞, 뒤 양쪽으로 구분돼 있다. 앞쪽은 일반 병사들의 지역이고 뒤쪽 금성은 고위직인 장군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중간에 제2의 성문으로 구분돼 있는데, 황동 못이 박힌 방어대가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손권이 오나라 전체 군사를 지휘하던 적벽탑. 7층 누각으로 높이만 49m다. 꼭대기에 오르면 삼국적벽고전장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뒤로는 49m 높이의 7층 누각인 적벽탑(赤壁塔)이 버티고 서 있다. 손권이 오나라 군대 전체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누각은 관광객들에게 개방된다. 계단 높이가 만만찮다. 7층 누각에 오르면 탁트인 전체 조망이 한 눈에 들어온다.

다시 성벽을 따라 10여분을 걸으면 적벽대전 박물관이 나온다. 이곳은 주유의 투구모양을 본떠 만들었다. 투구의 둥근 원형은 스크린 지붕으로 당시 상황을 3차원 영상으로 보여준다.

전시관에는 도자기로 만든 인물상과 이 지역에서 출토된 삼국지 당시 유물들이 진열돼 있다. 그러나 진품은 모두 형주의 박물관으로 옮기고 전시품들은 복제품이라고 한다. 2단계 공사가 진행 중이라고는 하지만 전시품이 조금은 허술한 느낌이다. 박물관 가이드도 체계적인 연구가 부족하다며 민간 소장품을 내놓지 않아 유물 수집에 어려움이 많다고 한다.

박물관을 돌아 다시 10여분 야트막한 언덕을 오르면 높이 10m의 주유(周瑜) 동상이 눈에 들어온다.

주유 동상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해 보인다. 머리는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망토도 오른쪽으로 휘날리고 있다. 가이드에 따르면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동남풍이 불기 시작했으니,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는 의미로 이렇게 조각했다고 한다. 주유 동상을 뒤로 하고 100여 계단을 내려가면 드디어 적벽(赤壁)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절벽을 만난다.

상상했던 만큼 규모가 웅장하지도, 위압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실망스럽다. 우리나라 강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절벽 정도다. 대략 40여m의 벼랑에다 붉은 글씨의 '赤壁'만 덩그러니 쓰여 있다.

이 글씨는 적벽대전 승리에 도취된 주유가 호승심에 단칼에 새겨놓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이 적벽대전의 현장임을 알려주는 붉은 글씨로 쓴 적벽. 승리한 주유가 호승심에 칼로 새겼다고 전해지지만, 전문가들은 1000년전의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누군지는 모르지만 대략 1000년 전의 글씨로 추정하고 있다. 그 위에는 또 다른 글자 롼(銮)’이 새겨져 있는데 글자라기보다는 이 지역의 중심신앙인 도교(道敎)의 문양이다. 창장의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새겨 넣었다고 한다.

적벽대전 당시 이곳은 창장 중 보폭이 가장 좁은 곳으로 수군이 배를 정박했던 곳이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적벽이라는 글자 아래 구멍이 4개 뚫려 있다. 배들이 정박하기 쉽게 막대기를 꽂던 곳이라고 한다.

1998년 창장 대홍수 때 최고 수위가 33.7m 까지 차올라 이곳이 완전히 침수됐다. 지금은 싼샤댐 건설로 더 이상 수위가 오르는 일은 없다고 한다.

적벽대를 뒤로하고 다시 10여분 언덕을 오르면 남병산(南屛山)이 나온다. 이곳은 제갈량이 적벽대전 당시 칠성단(七星壇)을 쌓고 동남풍을 부르는 제를 지내던 곳으로 후대에 사당을 지어 기념하고 있다.

1610년에 지은 동풍각(東風閣)과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 배풍대(湃風臺)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배풍대 현판 아래 무후궁(武侯宮)이라는 현판이 따로 붙어 있어 제갈량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삼국지에는 황개의 고육지계(苦肉之策)와 방통의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이용한 화공으로 조조군을 무찌를 계책을 마친 주유가 공명을 만나 서로의 속뜻을 확인하기 위해 시 한수를 던졌다.

欲破曹公(욕파조공) 조조를 깨뜨리려면
宣用火攻(선용화공) 마땅히 화공을 써야 하리
萬事俱備(만사구비) 모든 걸 갖추었으되
兄缺東風(형결동풍) 다만 동풍이 없구나

이에 제갈량은 남병산에 칠성단을 쌓아주면 동짓달 스무날 갑자일부터 세 밤 세 낮 동안 거센 동남풍을 불게 하겠다고 화답을 했다.

제갈량이 칠성단을 쌓고 동남풍이 불게 하려고 제를 지냈던 배풍대. 후대에 무후궁이라는 현판을 달아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실 주유와 제갈량은 동지이자 숙명의 라이벌이다. 주유는 서른여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설은 의미가 없겠지만 주유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삼국의 운명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주유는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하늘은 이미 주랑(周郞)을 낳았거든 공명(孔明)은 왜 또 낳으셨단 말인가’라며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숨을 거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남병산을 내려오면 적벽대전 당시 상황을 조각으로 재현해 놓은 ‘삼국조소원(三國彫塑園)’이 있다.

입구 양옆으로는 당나라 시대의 유명한 시인인 두목의 ‘적벽회고(赤壁懷古)’를 비롯해 두보와 이태백의 적벽가(赤壁歌) 등 적벽대전을 노래한 유명 시인 묵객들의 작품들이 현판으로 장식돼 있다.

공원을 들어서면 유비와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재현한 동상을 시작으로 수많은 작품들이 웅장한 정원과 함께 펼쳐져 있다.

삼국조소원을 지나면 제갈량과 운명을 달리했던 비운의 천재 방통이 은거했던 금란산(金蘭山)이 나온다. 높이래야 겨우 40~50m에 불과하지만 이곳 지형에서는 남병산과 함께 가장 높은 곳이다.

잰걸음으로 5분이면 정상이다. 정상에 오르면 먼저 정면으로 엄청난 크기의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암·수 두 그루가 붙어 있다. 조금 더 굵은 암나무의 쪽 삐져나온 곁가지가 두 눈과 입까지 신기하게도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1000년의 역사가 만든 작품이란다. 은행나무 뒤로 방통이 은거하며 공부했던 봉추암(鳳推菴)이 나온다.

1981년 중국정부가 국가 유적지로 지정하면서 세운 건물로 방통을 모시는 사당이다. 원래는 아홉 채가 있었지만 다 소실되고 한 채만 남아있다. 그 옆으로는 수령 1000년의 등나무가 있다. 방통이 등나무를 보고 화공(火攻)을 위해 조조군의 배를 쇠사슬로 묶는 연환지계(連環之計)를 생각해 냈다고 전한다.

당시의 등나무는 이미 죽고 지금 나무는 손자뻘이라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이다. 봉추암을 뒤로하고 10여분 마지막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내리면 계단을 따라 당시 적벽대전에 사용됐던 삼십육계 병법을 기록한 목판이 나온다.

미인지계(美人之計), 차도살인(借刀殺人), 소리장도(笑裏藏刀) 등 대부분은 들어봄직한 내용이지만 한국어로 된 설명이 없어 아쉽다. 다시 한 번 삼국지 내용을 되새겨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만리장성을 본뜬 진의전과 관우를 모신 사당을 지나오면 삼국적벽고전장의 팍팍한 일주코스도 끝이 난다.
방통이 젊은 시절 은거하던 봉추암. 원래는 아홉 채가 있었지만 지금은 한 채만 남아 방통을 기리는 사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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