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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오십천 솔섬에는 비석이 우뚝하네
본래 이 자리에는 회강정(洄江亭)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조선 성종 때 형조 참판을 지낸 최응현(崔應賢 1428~1507)선생이 산수를 감상하기 위하여 정자를 지었다. 삼척팔경에 들어갈 만큼 눈맛을 자랑하는 곳이다. 비록 지금은 없어졌지만 회강이라는 이름 그대로 강물이 휘돌아 가는 바위 섬 위의 몇 그루 소나무 아래의 운치있는 정자는 상상만 해도 저절로 힐링이 되었다. 바위에는 ‘회강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나 그 날은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1662년 허목(許穆 1595~1682) 삼척 군수가 편찬한 《척주지(陟州誌.)》에 의하면 ‘오십천은 백리를 흐르는데 굴곡이 심하여 오십번을 꺾고 나서야 동해바다에 이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 황하(黃河)는 만절필동(萬折必東 만 번을 굽이치며 동쪽으로 흐른다)이라는 삼척판 버전인 셈이다. 영동지방에서는 가장 긴 하천이다. 도계읍 구사리 백산마을 큰덕샘에는 ‘오십천 발원지’ 기념비도 있다. 서출동류수(西出東流水 서쪽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물)지역은 풍수가들의 말에 의하면 산에서는 인물이 나고 물에서는 재물이 난다고 했던가. 이래저래 명당으로서 조건을 딱 갖춘 곳인지라 많은 이들이 욕심을 냈겠지만 솔섬은 이미 지역의 유력가문인 강릉 최씨 집안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솔섬 주변의 들판은 비가 많이 오면 늘 홍수의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홍수방지를 위하여 주변에 방수림(防水林)을 조성했고 나무(山林)를 베지 못하게(禁) 특별관리를 했다. 그래서 금산평(禁山坪)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대비를 한다고 해도 인간의 능력으로 자연의 힘을 이겨내기에는 역부족이다. 5~60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바위 위에 만들어진 몇 평 규모의 작은 정자는 어느 날 사라졌다. 짐작컨대 홍수 때 약해진 주변 지반이 무너지면서 함께 넘어진 것이 아니였을까. 그럼에도 솔섬 위까지 물이 넘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욱 명당으로써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정자도 없어진 빈 터에 1864년 후손들은 최영원 선생의 묘자리를 만들었다. 2002년 여름 태풍 루사로 인하여 영동지방에 엄청난 양의 폭우를 뿌렸다. 전대미문의 홍수로 인하여 두타산 중턱에 있는 천은사도 계곡물이 넘치면서 1층의 대중용 식당인 공양간까지 물에 잠기는 난리를 치루었다. 당연히 하류의 솔섬에도 물이 범람했고 그 때 묘역 또한 안타깝게도 유실되었다. 안장 후에 150여년만의 만난 대홍수는 명당도 피해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를 애통히 여긴 36대 후손들은 그 해 바로 추모비를 세웠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시대를 증명하는 지역사를 품은 터가 된 것이다. 묘지를 대신한 20여년의 역사를 가진 비석이 앞으로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길 축원했다. 오전에 길이 없어 들어가지 못했다고 통화한 최선도 삼척문화원장께 오후에는 만반의 준비 끝에 무사히 답사를 마쳤다고 말씀드렸다. 경북 구미지방에 출장을 나온지라 함께 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셨다. 지난 번 삼척을 찾았을 때도 하루종일 함께 하면서 지역의 구석구석까지 설명해주신 자상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전 통화에서도 솔섬의 비석과 회강정에 대한 긴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더불어 되돌아 온 길을 따라 풀을 헤치고 물을 밟으면서 목이 긴 장화에게도 또다시 고마움을 표했다. 모래 자갈길을 빠져나온 뒤에서야 평소에 신던 신발로 갈아 신었다. 어렵게 답사를 마친 뒤에 오는 뿌듯함을 안고서 돌아오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볍다. 비석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되었지만 또다른 많은 생각을 하도록 만든 솔섬 답사였다. 이제까지의 경험치는 미래까지 담보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또다른 사례를 알게 된 것이다. 앞으로도 기후위기는 우리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을 알리는 서막이라면 서막이라 하겠다. 지난 여름은 엄청 더웠다. 열대야로 잠못 이룬 밤이 계속 되었다. 더 비관적인 전망은 2024년 여름이 앞으로 더욱 심해질 더위의 전주곡이라는 장기예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오지않을 것 같은 가을이 왔다는 사실에 매우 안심하는 중생(衆生)세계의 청량한 아침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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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마카오(Macau)가 있기 전에 마조각(媽祖閣)이 있었다
마카오 중국반환 25주년 기념법회에 참석했다. 오문(澳門)불교협회 초청에 의한 것이다. 방문선물은 중국정서를 잘 아는 통역가 선생께서 미리 준비한 김 4박스였다. 다시금 한국 김의 인기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비행기로 3시간30분남짓이면 갈 수 있는 멀지 않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방문하게 되었다. 태풍이 오는 길목을 용케도 피해 무사히 예정 시간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었다. 출발 며칠 전에 서점에 들러 관광안내 책자를 구입했다. 잘 알지 못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이 홍콩에 관한 내용이고 마카오는 덤으로 얹혀있을 만큼의 적은 분량으로 구성된 얇은 책이다. 안내책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sns시대에는 오히려 검색이 호기심과 많은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마카오는 15세기 명나라 때 개항했으며 주로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면서 무역을 한 거점지역이다. 이후 상인들은 정식으로 세금을 내면서 공식적으로 체류하는 절차를 밟았다. 아편전쟁 후 1887년 포르투갈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1999년 중국에 반환했다. 인구 60여만명에 서울 은평구 정도의 면적이라고 한다. 이웃에 있는 홍콩은 700만명이라는 과밀도의 인구를 가졌다. 향항(香港)은 반환 할 때 국제뉴스로 떠들썩했고 그 이후에도 양국(중국·영국)의 경제체제 차이로 인한 불협화음은 물론 거주민과 정치적 갈등으로 인하여 외신의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린데 비하여 마카오는 상대적으로 무탈한 곳이였다. 마카오(Macau)란 이름의 근거부터 찾았다. 지명의 발상지는 ‘마조각(媽祖閣)’이다. 중국어 ‘마쭈거’가 ‘마카오’(포르투갈어)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공식한자표기인 오문(奧門 아오먼. 의미:항구의 문)은 한 때 마교(馬交 마가우. 광동어)로 표기하기도 했다. 현재는 오문(奧門)이라고 쓰고 ‘마카오’라고 읽는 것으로 공식화된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801년 가을 제주도에 표류한 외국인의 국적을 ‘막가외(莫可外)’라고 적었다. 이 역시 ‘마카오’와 발음이 유사하다. 마조(媽祖)는 뱃사람을 지켜주는 수호신으로 바다의 여신이다. 마카오(Macau)라는 지명의 발상지인 마조각(媽祖閣)이 있는 아마사원(媽閣廟)은 유교 불교 도교 민간신앙이 합쳐진 ‘만신전(萬神殿 판테온)’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육백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문화유산이다. 마조각을 중심으로 하여 차츰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가 형성되었다. 지역민은 마카오의 근원이자 마카오의 시작인 마조각을 이렇게 찬탄했다. “선유마조묘(先有媽祖廟) 후유오문성(後有奧門城) 처음에는 마조묘(媽祖廟)가 있었고 그런 다음에 오문성(奧門城)이 생겼다.” 광동성 광주(廣州 광저우)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광효사(光孝寺)에도 “미유양성 선유광효(未有羊城 先有光孝) 광저우가 있기 전에 광효사가 있었다”는 말이 전한다. 양성(羊城)은 광저우의 또다른 이름이다. 《육조단경》에서 광효사는 법성사(法性寺)로 불렀다. 중국선종의 실질적 개산조(開山祖)인 혜능(惠能638~713)행자가 인종(印宗)법사를 만나면서 삭발한 곳이다. 그 머리카락을 사리(舍利)처럼 모셔둔 예발탑(瘞髮塔. 瘞:묻을 예)이 가장 유명하다. 마카오 반환법회에 참석한 광효사 주지 명생(明生 밍셩)대사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유일한 관광일정은 마카오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보제선원(普濟禪院) 관음당(觀音堂)을 참배한 일이다. 태풍 후 비 그친 오후 틈새를 이용하여 찾았다. 원(元)나라때 창건되었으니 마조각과 비슷한 600년 연륜을 가졌다. 시내 큰길가에 있는 도심형 사찰이었다. 몇 개의 불당(佛堂)을 지나가며 미로같은 복도를 계속 꺾으면서 몇번씩 걸어야 하는 건물구조였다. 중심건물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이 사찰의 다른 이름인 ‘관음당’의 뿌리가 되는 곳이다. 야외에는 높이20m 무게50톤 관음상을 모셨는데 이 역시 마카오 반환을 기념하는 작품이었다. 보제선원의 뜰에서 대리석으로 만든 둥근 탁자와 의자 4개 앞에서 일행들은 멈추어 세웠다. 중국과 미국의 조약이 체결(1884년)된 역사적인 장소로 근대사의 아픔이 녹아있는 곳이였다. 하기야 육백년 동안 무슨 일이 없었겠는가? 원·명·청의 왕조가 교체되었으며 또 열강의 침탈까지 고스란히 지켜보았을 것이다. 2박3일의 공식일정에 쫓겨 결국 찾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는 마조사원을 대신하여 관음당을 찾은 것으로 달랜 셈이다. 왜냐하면 불가의 관음보살은 도가의 마조 역할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역할도 비슷하고 외형도 닮았으며 주로 바닷가에서 쉬이 만날 수 있다. 주지 계성(戒晟 지에청)대사의 자상한 미소와 안내 덕분에 딱딱한 공식행사 속에서 그나마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마카오불교총회장 소임을 맡아 이 행사를 주관한 위치인지라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책임감이 뚝뚝 묻어난다. 돌이켜보니 행사장 다닌 것 외에는 별다른 기억도 남아있지 않는 짧은 일정이었다. 비슷비슷한 내용의 지루한 축사는 어떤 행사장이건 치뤄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그래도 기행문 원고를 정리하기 위해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한 컷 한 컷 담아놓은 장면들을 챙겨보며 그 날의 기억을 되살렸다. 사진 속에서 오가는 길은 호텔버스를 이용한 시내관광이 되었음을 알았다. 섬과 다리가 이어지고 멀리 만(灣) 건너 고층빌딩이 모여있는 마천루가 그리는 스카이라인을 조망했던 기억도 더듬을 수 있었다. 차창 밖으로 흐르는 빗줄기도 제대로 찍혔다. 여행 뒤에 남는 것은 역시 사진 밖에 없다는 말에 다시금 공감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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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울산 태화강의 시작점은 중국 만주 오대산이었다
속이 후련해지면서 바로 홧병이 나았다. 하지만 일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후 바람만 불면 대숲에서 외친 소리가 그대로 축음기처럼 반복되는 것이였다. 십리대숲을 걷다가 그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놓은 그림 아닌 그림을 만났다.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은 시간이란 열차에 우리들을 태우고서 신라시대로 데려다 주는 마법사가 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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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일연스님 …가파른 절벽 위에 뿔을 걸고 숨은 산양처럼 은둔하다
현재 지역주민의 일연스님 사랑은 끝이 없다. 옮겨버린 원래 부도자리 빈터에는 역사성을 살려 다시 새로 만든 부도를 안치했다. 어머니 산소 앞에는 1997년 ‘낙랑군부인이씨지묘(樂浪君夫人李氏之墓)’ 글자를 새긴 상석을 마련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옛이야기를 구체적 형상으로 다시 살려낸 것이다. 2017년 모친무덤과 아들의 원래 부도터를 잇는 길이 포함된 ‘일연 테마로드’ 라는 순례길을 만들었다. 효도길 끝자락에는 ‘일연공원’까지 조성하여 삼국유사 편찬이라는 기념비적 업적을 후손들이 영원히 기억토록 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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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한양의 태릉에서 서라벌의 화랑을 만나는 시간여행
역사란 해석학이라고 했다. 물론 해석의 권한은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나름대로 과감한 해석을 시도했다. 서라벌에 뿌리를 두고 있는 1500년 역사의 화랑이란 이름과 한양에 근거를 두고서 500년 역사를 가진 태릉이란 이름은 각각 출발지가 달랐다. 하지만 백여년 전에 태릉역이 생기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후 두 이름이 연결되면서 화랑대역이 되었다. 철도는 사람과 물자를 이어주면서 정신까지 함께 이어주었다. 신라 화랑과 조선 승군 그리고 한국 육사가 ‘호국’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동일한 공간에서 만나도록 주선했다. 이 모든 것을 서로 연결시켜 준 플렛폼은 문정왕후의 태릉이라 하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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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양주 회암사에서 만난 '겹쳐짐의 미학'
회암사 옛터에서 여말선초 삼화상으로 불리는 고승을 동시에 만났다. 또 풍수지리 전문가로써 안목까지 발휘된 곳이다. 궁궐과 사찰이 겹쳐진 건축물 위에서 고려와 조선의 역사가 중첩된 시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인도와 중국 그리고 미국까지 관계된 공간임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많은 옛인연들이 겹겹으로 쌓여있는 터에 다시 새로운 시절인연들이 하나하나 더해지고 있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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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땅에 묻은 삶은 계란에서 닭이 태어났다는 곳
이른 아침 소양강댐 주변은 물안개로 가득하다. 해가 뜨면서 차츰차츰 주변이 제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길가의 가파른 시멘트 벽 위에 길다랗게 세로로 덧댄 낡은 마루바닥재로 마감을 한 70년대 스타일의 간판이 보인다. 오래 전부터 지역사회에 전해오는 스토리텔링 3개가 꼰대세대도 읽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주먹만한 글씨로 촘촘히 박혀 있다. 만든지도 꽤 오래 되었고 바탕색마저 다소 바래긴 했지만 독해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다. 왼쪽에는 짧은 이야기 두 편이 아래 위로 나란히 적혀있고, 오른 쪽은 긴 이야기 한 편을 써놓았다. 비교적 구성이 탄탄한 한천자(漢天子) 전설에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마을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 한(漢)씨 성을 가진 총각이 부친과 함께 머슴살이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가난한 살림으로 인하여 묘자리를 구할 수가 없어 남새밭에 가매장을 했다. 어느 날 스님들이 나타나서 하룻 밤 묵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한다. 총각은 자기 방에서 함께 머물게 했다. 부탁한 계란은 끓는 여물 솥에서 삶은 뒤 드시라고 갖다 주었다. 한 밤중이 되어 스님들이 길을 나서자 총각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몰래 따라갔다. 가리산 중턱에 이르자 그 계란을 땅에 묻고서 밤새 기다리는게 아닌가. 여명이 밝아 올 무렵 땅 속에서 수탉이 나오더니 홰를 치며 크게 울었다. “진짜 명당이로다.” 그 후 총각은 아버지 시신을 그 자리에 묻었다. 발복(發福)하여 천자(天子 임금)가 되었다. 구전(口傳)이라고 하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전달하는 사람이 자기생각을 다시 보태고 윤색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전설도 마찬가지다. 스님이 계란을 달라고 하니 당연히 먹는 줄 알고 삶아서 드렸다. 머슴총각의 사려깊은 배려심이 돋보인다. 그리고 스님은 날계란도 아닌 익힌 계란으로 병아리도 아닌 수탉을 만들어 내니 도력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그 땅은 알을 품고서 금방 닭으로 키울 정도로 생기와 생명력을 갖춘 명당이라는 사실도 넌지시 암시해준다. 명당이 되려면 터도 중요하지만 그 터를 사용하는 주인이 그만한 복을 지어야 한다. 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스님의 3가지 처방과 함께 머슴총각의 드라마틱한 상상력과 행동이 더해지는 구조로 진화한다. 즉 첫째 금으로 된 관을 사용해야 하며 둘째 황소 백 마리를 재물로 바쳐야 하며 셋째 관을 땅 속에 묻을 때 철갑과 투구를 쓴 사람이 곡(哭)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머슴총각은 노란 귀리 짚으로 만든 두루말이 멍석으로 금으로 만든 관을 대신하여 아버지의 시신을 쌌으며, 솥뚜껑을 투구처럼 쓰고 하관(下棺)하면서 크게 울었고, 몸에서 피를 빨아먹고 황소만큼 자란 이(蝑) 백 마리를 잡아서 재물로 바쳤다는 내용이 추가 되었다. 한(漢)씨라는 성은 한(漢)나라를 연상케 한다. 그리하여 한씨 총각의 활동무대는 중국으로 바뀌었다. 짚으로 만든 북을 쳐서 소리나는 사람이 천자가 된다는 공고문이 나붙었다. 신라의 이사금은 떡을 물고서 남보다 많은 치아자국으로 인하여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대로 북을 쳤지만 누구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한씨가 북을 치자 온 장안에 북소리가 울려 퍼졌고 총각은 천자(天子)로 추대되었다. 뒷날 천자 부친의 무덤이 너무 초라한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강원도 가리산 지형이 너무 험하여 중국 황실에서 올 수가 없어 치산(治山 산소를 매만지고 다듬는 일)하지 못한 까닭이라는 설명이 보태지면서 현재와 같은 탄탄한 구조를 가진 이야기로 완성되었다. 가리산과 한천자의 묘를 알리는 공공안내판 구전의 배경인 ‘한천자 묘’는 이미 인터넷 검색을 해 두었다. 위치는 춘천시 북산면 물로리 58-1번지다. 인근에 은주사(銀住寺)라는 절이 있다. 소양강댐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물로리로 가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육로를 이용하는 것이 더 쉬운지라 주소를 따라갔다. 홍천을 경유하여 다시 춘천으로 들어가는 경로다. 포장된 도로에 봄날임에도 불구하고 ‘월동장비 미착용시 진입금지’라는 안내문이 군데군데 있을만큼 가파르고 험했다. 지난 겨울 머물던 곳에서 밤새 내린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차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전내내 갇혔던 까닭에 그 날 일정 두 건을 펑크냈던 기억까지 되살아 날 정도였다. 마지막 표지판 가도 가도 목적지를 가르키는 표지판은 1도 보이지 않는다. 제대로 가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계속 들만큼 굽이굽이 에스(S)자를 거듭거듭 그리면서 골짜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얼마를 달렸을까. 고속도로 휴게소 알림판 크기의 ‘어서 오십시오. 물로리 한천마을’이라는 다소 생뚱맞은 모양의 입간판을 만났다. 생경함과 반가움이 교차하면서도 ‘제대로 가고 있구나’하는 안도감을 준다. 얼마나 달렸을까. 드디어 관공서 표준형 안내판 ‘가리산 방향’과 ‘한천자 묘’가 나타난다. 이내 비포장길이 시작되었고 ‘절골로’라는 도로명 답게 드문드믄 사찰들이 자리잡고 있다. 별장같은 민가들도 사이사이 보인다. 드디어 마지막 절인 은주사가 나타났다. 산신각을 참배하면서 오늘 일정을 무사히 마치게 해달라고 기원했다. 이제부터 묘까지는 본격적인 가리산(加里山) 등산길이다. 한천자 묘 이 묘자리는 풍수연구가 사이에서 반드시 둘러봐야 하는 명당터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산삼을 캐는 심마니들도 방문인사를 빠뜨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하여 많은 이들이 땀 흘리며 찾아오기를 마다하지 않는 곳으로 입소문난 곳이다. ‘기적의 천자길’ 따라 세워진 안내판 1.꿈-2.신념-3.기적(하늘이 돕다)-4.기적(기적은 계속된다)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가다가 숨을 몰아 쉴 무렵 마침내 목적지가 눈 안으로 들어왔다. 작은 계곡을 조심조심 건넜다. 곁에 ‘한천자 묘’라는 설명문과 안내판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칠 만큼 평범하고 소박한 한 무덤이다. 하지만 보통사람의 눈에도 그 터 만큼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긴 비범한 터에는 그 자리에 어울리는 전설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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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대한민국 부자 1번지 솥바위 그리고 승산마을을 찾다
한 해가 시작될 무렵에는 정암(鼎巖·솥바위, 경남 의령)을 찾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다.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 안에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를 배출한다는 전설을 지닌 바위다. 그 전설 덕분인지 정암을 중심으로 한국 재벌가인 삼성, 효성, 금성(LG.GS 전신) 집안 본생가(本生家)가 삼각형을 이루면서 자리 잡았다. 전설이 전설이 아니라 눈앞의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전설이 현실이 될 때는 설득력을 가진다. 설득력 있는 장소는 명소가 되고 명소는 사람을 부르게 마련이다. 바위신앙의 역사는 인류 출현과 함께할 만큼 그 역사가 길다. 특히 솥바위는 부(富)를 기원하는 성소(聖所)였다. 농업이 산업의 중심인 시절에는 솥 안에 가득한 모락모락 김이 나는 흰 쌀밥은 그 자체로 부귀의 상징인 까닭이다. 농업자본이 농업자본에서 멈춘다면 그것은 그대로 과거사로 정지된다. 즉 전설로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은 농업자본이 농업자본으로 멈춘 것이 아니라 상업자본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한 인재를 배출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솥바위의 영험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또 부귀는 현대인들이 ‘대놓고 추앙하는’ 또 다른 종교로 자리매김하는 시류까지 한몫을 더했다. 따라서 ‘솥바위교’ 신도들도 날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날도 바위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선여인(善女人)들을 만났다. 경남 의령 솥바위 심리적으로 잠재적 솥바위 신도인 현대인들을 불러 모으는 정암을 찾았다. 새해가 되면 꼭 참배해야 하는 ‘기(氣) 충전소’임을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 지자체는 아예 ‘대한민국 부자일번지’를 표방하고 있다. 포토존 의자에는 ‘함께 부자가 되자’고 하면서 ‘富(부)’ ‘Rich(리치)’ 등 한문과 영어를 병기하여 구세대는 물론 신세대까지 동시에 불러 모으고 있다. 솥바위는 남강 가운데 우뚝하게 자리 잡았다. 풍수학자들은 물은 재물을 상징한다고 했다. 재물이 바위에 걸리면서 천천히 흐른다. 자연스럽게 재물이 쌓이는 구조다. 그런 바위를 나성(羅星)이라고 한다. 세 부자 집안 기업의 공통 상호인 ‘성(星)’자가 여기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요즘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예부터 정암진 나루터는 남해와 낙동강을 따라 온 물자들이 서부경남 내륙으로 들어가는 물류의 거점이었다. 근대에도 철교가 놓일 만큼 교통요지로서 위상도 만만찮았다. 관광객들이 포토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먼저 전경을 살피고자 언덕 위에 있는 정자인 정암루(鼎巖樓)에 올랐다. 안내문에는 빼어난 경치로 인해 많은 선비와 가객들이 찾아 학문을 논하고 자연을 노래했다고 적혀 있다. 함안 가산(家山) 기슭에 무덤이 있다는 어변갑(魚變甲·1381~1435) 선생이 누각에서 주변 풍광을 노래한 시가 남아 있다. 그는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조선 초기 문신이다. 춘수정암횡련벽(春水鼎巖橫練碧)이요 춘풍자굴전병신(春風闍堀展屛新)이라. 봄날 흐르는 솥바위의 강물은 비단을 펼친 듯 푸르고 가을바람 부는 자굴산은 병풍을 펼친 듯 새롭네. 그 시에 자굴산(闍堀山)이 나온다. 인도 마갈타국 수도 왕사성 동북쪽에 있는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闍’는 ‘사’ 혹은 ‘자’로 읽는다. 보통 사굴산(강릉 굴산사 당간지주가 있는 산)이라고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자굴산이라고 부른다. 어쨋거나 사굴이건 자굴이건 모두 인도말 ‘기자쿠타(gijjha-kuta)’의 소리번역이다. 원문 발음대로라면 ‘사’보다는 ‘자’로 읽는 게 맞겠다. 하지만 자굴산보다는 사굴산으로 읽는 것이 모두에게 익숙한 편이다. 결국 문법은 많이 쓰는 사람 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역사회에서 읽어왔던 관례는 존중되어야 한다. 기사굴산은 붓다께서 머물면서 설법하던 곳으로 세계적인 불교성지다. 법화경은 서두에 기사굴산에서 설했다는 말로 시작된다. 산봉우리가 독수리와 닮았다고 하여 영취산(靈鷲山·영축산)으로 부른다. 소리번역이 아니라 뜻번역이다. 전남 여수 등 전국 몇 곳에 영취산이 있다. 양산 통도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은 한문으로 같은 표기를 함에도 불구하고 ‘영축산’으로 읽는다. 이 또한 지역사회의 읽기 관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함안은 아라가야에 속하는 가야문화권이다. 고구려, 신라, 백제가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데 반하여 가야불교는 허황후와 장유화상에 의해 인도에서 직수입됐다. 남쪽 지방에 있는 산 이름에도 그런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하겠다. 논어에는 ‘지자요수(智者樂水) 인자요산(仁者樂山)'이라고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 따로 물 따로’는 아니다. 늘 함께한다. 그래서 묶어서 요산요수(樂山樂水)라고 한다. 산은 인물을 키워주고 물은 재물을 늘려준다고 했다. 솥바위에서 진주 방향으로 구씨(LG)와 허씨(GS) 집안이 대대로 함께 살고 있는 승산(勝山)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은 ‘지수(智水)면 승산(勝山)리’다. 산이름과 물이름이 함께 어우러진 명당마을이라 하겠다. 지자체에서 '부자 일번지'라는 홍보문구를 적어 놓았다. 승산마을 골목길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마을길을 함께 걸었다. 600년 전통의 부자마을 허씨와 구씨 집성촌답게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번듯한 기와집이 동네 전체에 빼곡하다. 한양의 명문세도가들 사이에서도 ‘진주는 몰라도 승산은 안다’고 할 만큼 조선시대에도 큰 관심을 받은 동네라고 했다. 좋은 기운은 많이 받을수록 좋다고 하였으니 계속 동네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면서 거듭 두어 바퀴 걸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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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조강(祖江)에서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시작되었다
바닷가에도 삼강이 있다. 한반도에서 가장 거대한 삼강을 찾는다면 한강과 예성강 임진강이 만나는 조강(祖江)구역이라 하겠다. 강화도 북부해안선과 맞닿은 곳이라 강인지 바다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지만 아무튼 선인들은 이 곳을 조강이라고 불렀다. 조선의 실학자 이긍익(1736~1806)선생이 지은《연려실기술》에는 ‘교하 서쪽에 이르러 한강은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 북쪽에 이르러서는 조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현재 군사적인 이유로 전체경관을 조망하기는 어렵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없다면 옛조상들의 시각을 통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밖에 없겠다. 다행이도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1168~1241) 거사는 ‘조강부(祖江賦)’라는 글을 남겨 두었다. 그는 당시 수도인 개경(개성)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계양(桂陽 현재 인천시 계양구)으로 부임하는 길은 배를 타고서 조강을 건너야 한다. 강물이 너무 넓은 까닭에 검게 보였으며 한강 임진강 예성강 등 여러 강물이 모인 까닭에 파도가 심할 뿐만 아니라 소용돌이까지 쳤다고 했다. “넓고 넓은 강물이...시커먼 빛 굼실굼실 보기에도 무서워라. 달리는 뭇 내를 모았으니 솥의 물이 들끓는 듯...바람도 없는데 물결치니 눈 같은 물결이 쾅쾅 돌에 부딪치는 모양... 저 사공은 집채같은 물결에는 익숙해도 빙빙 도는 소용돌이를 무서워하네. (중략)” 조강(祖江 할아버지 강)은 ‘근본이 되는 강’ ‘시원이 되는 강’이라는 뜻이 되겠다. 그래서 선인들은 조강을 단순히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모인 보통 삼강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로부터 아들 딸 손자 손녀로 이어지는 것처럼 조강에서 한강 예성강 임진강이 시작되었다는 역발상까지 했던 것이다. 근거는 밀물이다. 만조 때 바닷물이 육지방향으로 밀려 오면서 역류가 되어 삼강으로 다시 흘러들어가는 광경을 예사롭게 여기지 않았다. 즉 조강에 호수처럼 바닷물과 강물이 가득차면서 거꾸로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시원(始源)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태고적부터 비록 짧은 시간이긴 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삼강의 역류’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조강이라고 불렀던 것이 아닐까? 속리산 천왕봉에 내린 눈비가 각자 삼강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보고서 삼파수라는 이름을 붙인 것 만큼이나 경이롭다. 조강은 우리나라의 ‘근본이 되는 강’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조강은 조선의 도읍지 한강 뿐만 아니라 고려의 세계무역 중심지였던 예성강 입구의 벽란도와 미래 코리아 수도의 후보지라는 교하(交河 임진강과 한강의 합수지역. 경기도 파주시 교화읍)를 포함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신월(愼月)이 끝나고 봄 기운이 퍼질 무렵 적당한 날을 골라 강화도 섬 안의 섬인 교동도 전망대로 가서 조강(祖江)을 제대로 살피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그 위를 푸른 용처럼 날아다니며 갑진년 청룡의 해를 장대한 스케일로 웅대하게 시작해야겠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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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철스님의 '가로세로'] 황강의 푸른 빛을 머금고서
영남지방 낙동강의 지류 가운데 경남에서 가장 긴 강은 남강과 황강이다. 남강은 진주 촉석루를 품으면서 임진왜란의 진주성 전투와 논개 스토리를 남겼다. 황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하여 거창 수승대 앞을 지나 합천댐에서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합천 읍내를 휘감아 흐른다. 모래톱이 아름다운 강변 맞은 편 절벽의 대야성(大耶城)과 연호사(烟湖寺) 그리고 함벽루(涵碧樓)에는 많은 이야기가 켜켜이 쌓여 있다. 대야산성ㅡ연호사 ㅡ 함벽루ㅡ 불교문화전수관ㅡ일주문으로 이어지는 황강 풍경 대야성 전투는 삼국시대로 거슬려 올라간다. 신라와 백제가 황강을 국경선 삼아 대치하던 군사요충지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몇 천명이 전사하고 일천명의 포로가 나올만큼 당시로서는 어머어마한 규모였다. 대야주 도독 부인은 뒷날 태종무열왕이 된 김춘추(金春秋 603~661)의 딸 고타소(古陀炤)였다. 사위인 김품석과 함께 그 전투에서 산화(散花)했다. 그 소식을 들은 서라벌의 아버지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하루종일 기둥에 기댄 채로 서 있었으며 그 앞을 다른 가족이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전사자 영혼의 명복을 빌고 또 지역사회에 남은 가족과 주민을 위로하기 위한 사찰이 세워졌다. 대야성과 강물로 이어진 곳이다. 풍수가들은 누런 소가 강물을 마시는 자리라고 했다. 그래서 산 이름도 황우산(黃牛山)이다. 황우는 부처님의 성씨인 ‘고타마’에서 왔을 것이다. 인도말 고타마는 ‘훌륭한 소’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옮기면 그대로 황우(黃牛)가 된다. 전쟁 후 핏빛으로 물든 강물을 정화하여 맑은 물로 바꾸는 역할을 맡긴 것이다. 창건주 와우(臥牛)대사 법명도 그 의미의 연장선상으로 보인다. ‘누런 소가 강물을 마시는 자리’는 전쟁 트라우마로 인하여 생긴 마음의 상처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성지가 된 것이다. 남명 조식(南冥曹植 1501~1572)선생은 그런 황강의 역사를 시로 남겼다. 길가 풀은 이름없이 죽어가고(路草無名死) 산의 구름은 제멋대로 일어난다.(山雲恣意生) 강은 무한의 한(恨)을 흘러 보내며 (江流無限恨) 돌과는 서로 다투지 않는구나.(不與石頭爭)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산하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강물은 맑음을 되찾았고 아침이면 물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煙) 한낮에는 흰 모래밭이 햇볕에 반짝이는 너머 늪지인 정양호수(湖)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경치를 자랑하는 연호사(烟湖寺) 동쪽 곁에는 새로운 누각이 ‘절처럼’ 들어왔다. 함벽루(涵碧樓)는 1321년(고려 충숙왕 8년) 합주(陜州)의 행정책임자(知州事 군수)인 김영돈(金永暾 1285~1348)이 건립했다. 함벽(涵碧)은 ‘푸른 빛으로 적신다’는 뜻이다. 물가에 있는 나무집인지라 습기와 홍수 때문에 연호사와 더불어 수차례에 걸쳐 수리에 수리를 거듭했을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함벽루 기(記)’에 의하면 1680년 합천 군수 조지항(趙持恒)이 중창한 것이다. 동시에 연호사도 함께 수리했다는 기록까지 남겼다. 함벽루가 너무 퇴락하여 중수코자 하였으나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날로 고민이 깊어졌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여름홍수에 뜻밖에 기둥과 대들보가 될만한 재목 100여개가 떠내려 왔다. 그리고 못을 주조할 수 있는 쇳가루도 모래톱에 함께 쌓였다. 범람한 물은 사금은 아니지만 꼭 필요했던 사철(沙鐵)까지 가져 온 셈이다. 홍수는 집을 떠내려가기도 하지만 집을 만들 수 있는 나무를 싣고 오기도 하는 두 얼굴 이었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선생은 이를 두고서 ‘사람의 정성이 나무와 쇠를 감동시킨 결과’라고 했다. 남은 재목과 여력으로 함벽루 서편 연호사까지 중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불가의 사찰과 유림의 누각은 다시금 조화를 이루었다. 함벽루는 대야산성 절벽 강 기슭에 위치하며 황강과 늪지인 정양호를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 때문에 시인과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았다. 전국의 많은 누각이 있지만 추녀 끝의 낙숫물이 바로 강물로 떨어지는 곳은 남한에서 유일하다고 한다. 특히 그 소리를 듣고자 비오는 날이면 많은 이들이 찾아왔다. 뒷날 강물의 흐름이 다소 바뀌고 떠내려간 축대를 거듭 쌓으면서도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 중수할 때마다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를 지키고자 부단한 노력이 뒤따랐다. 처마의 낙숫물이 강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살리기 위해 산책데크길과 축대사이에 틈을 두었다 앞면 3칸 측면 2칸 대들보 5량인 별로 크지도 않는 넓이의 누각 안에 빼곡이 걸려 있는 현판들이 하도 많은지라 하나하나 세어보니 족히 스무개가 넘었다. 아마 여러 가지 이유로 수없이 내걸리고 또 수 없이 내려지면서 교체에 교체를 거듭했을 것이다. 현재 남은 것이 이 정도이니 가히 누각의 명성과 주변 풍광의 뛰어남을 짐작할 만하다. 퇴계 이황(1502~1571)과 남명 조식 선생 글도 보인다. 지역선비들도 질세라 이름자를 빠뜨리지 않았다. 시월의 긴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연호사를 찾았다. 대야성 연호사 함벽루 수심당 불교문화전수관 일주문으로 이어지는 강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대야(신라) 합주(고려) 합천(조선)으로 지명도 함께 이어졌다. 도량 인근에는 지역유지들의 공덕을 기록한 비석을 모은 ‘비림’과 함께 합천이씨 재실인 ‘공암정(孔巖亭)’ 그리고 ‘황벽루보존유림계’와 ‘대동계’ 비석, 강석정 시인의 황강시비. 활터인 죽죽정. 대야성 전투 때 활약한 충신 죽죽(竹竹)의 비각 등이 거리를 두고서 자기자리를 잡았다. 지자체와 지역주민 그리고 사찰이 함께 힘을 합해 가꾸는 살아있는 역사문화지구의 현장이라 하겠다. 사족을 보탠다면 합천군수를 지낸 강석정 시인은『연호사지(烟湖寺誌) 조계종출판사 2017)』저자이며 성철(性徹 1912~1993)스님은 합천 이씨집안 출신이다. 함벽루에서 바라본 황강의 풍광 연호사에는 강원(講院)에서 함께 공부했던 도반 J스님의 원력(願力)에 의하여 함벽루 동편에 수심당 불교문화전수관 일주문을 지으면서 비로소 사격을 제대로 갖추게 되었다. 황강이 내려다보이는 안심당(安心堂)에서 차를 나누며 옛 기억을 더듬었다. 1980년대 연호사는 일박이일 예비군 훈련을 받기 위해 일년에 한 두 번 정도 지역의 학인승려들이 와서 하룻밤 묵던 곳이다. 어느 해에는 심한 가뭄으로 얕아진 강물에 바지를 걷어올리고서 건넛편 군부대 훈련장까지 걸어갔던 기억 등을 이야기하며 함께 웃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어느 새 지난 일을 추억하는 구시대의 인물이 되었다는 말에 또 웃었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