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리포트]베이징은 올림픽 축제 분위기 ‘올인’, 중국과 올림픽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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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08-03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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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이미 올림픽 축제 분위기에 들어갔다. 13억 중국인들은 이제 지구촌 잔치 베이징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올인’해 있다.

역대 올림픽 사상 최대인 세계 정상 100여명을 맞을 준비에 여념이 없다. 또 67억 지구촌 세계인들에게 더욱 가까워진 중국을 한껏 뽐낼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번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는 무려 3만3000발의 불꽃축포가 터져 베이징시를 불밝히게 된다. 2일 열린 개막식 리허설에서 선보인 불꽃폭죽으로 주경기장과 인근 지역이 마치 화염에 휩싸인 듯하다.

2일 저녁에는 다시 한번 개막식 리허설이 대규모로 열려 수천발의 불꽃폭죽이 베이징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이제 최종 리허설은 5일 단 한번만 남겨놓고 있다.  

오는 6일에는 마지막 봉송지이자 이번 올림픽 주최도시인 베이징에 성화가 들어온다. ‘입경(入京)’ 성화는 3일 동안 베이징 시민들에게 지난 여정을 전하고 8일 저녁 개막식에 맞춰 성화대에 최종점화된다. 그리고 대회기간 17일 동안 29회째를 맞는 지구촌 축제 베이징올림픽을 지켜준다. 

지난 4월 2일 카자흐스탄을 시작으로 해외봉송길에 나선 성화는 한달여동안 전세계 19개국, 19개 도시를 돌았다. 또 5월 2일 중국 특별행정구인 홍콩을 시작으로 국내봉송길에도 올라 31개 성•시•자치주 등 113개 도시를 돌았다.

국내•해외를 합친 성화봉송 기간은 130일, 거리만도 13만7000km, 봉송주자 2만1880명 등으로 이 또한 역대 최고, 최대를 기록했다.

특히 사상 최초로 8844m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산 정상을 향한 봉송도 성공적으로 마쳐 올림픽사를 새로 쓰게 했다. 
   
 
중국은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사상 처음으로 사격종목에 출전한 쉬하이펑이 금메달을 땄다. 사진은 당시 시상대에 선 쉬하이펑 모습.


그러나 이번 올림픽 성화길은 붙여진 ‘화해의 여정(和谐之旅)’이란 이름을 무색하게 했을 정도로 지난했다는 평가다.

해외봉송 직전에 터진 티베트 독립시위로 인해 일부 국가에서 반대시위에 부딪혀 빛을 바랬다. 또 국내봉송 도중에 터진 쓰촨성 대지진은 올림픽 개최에 대한 불안감 마저 줄 정도로 위기를 맞기도 했다.

이제 성화는 이같은 고난의 여정을 모두 이겨내고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분 8초’ 베이징올림픽 첫 축포를 위한 마지막 길을 달리고 있다.

올림픽 개막 ‘D-10’이었던 지난달 29일 중국은 베이징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는 대규모 문화예술 행사를 가졌다.

행사 이름은 ‘바이녠위안멍(百年圆梦•백년원몽)’. ‘백년만에 이루는 꿈’ 쯤으로 해석된다.

지금 중국과 중국인은 이번 베이징올림픽을 100년 동안 기다려온 꿈을 이루는 감격적 무대로 여기고 있다. 중국과 올림픽의 역사적 인연이 꼭 1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 1908년 제4회 런던올림픽이 끝난 뒤 톈진(天津)의 한 주간지 ‘톈진칭녠(天津青年)’은 “우리는 언제쯤 올림픽을 치를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글을 실으면서 처음으로 올림픽에 대한 강한 염원을 나타냈다.

2년 뒤 1910년 난징에서 열린 제1회 전국체육대회 구호는 아예 ‘하루 빨리 올림픽에 참가하자, 하루 빨리 올림픽을 개최하자’로 정했다.

이어 1922년에는 왕정팅(王正廷)이 최초로 IOC(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 중국위원으로 당선됐다.

그러나 중국올림픽조직위원회는 1931년에야 비로소 IOC로부터 국제적 승인을 받게 됐다. 이 때부터 중국은 정식으로 올림픽 국제무대에 얼굴을 내밀게 됐다.

이듬해인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당시 동베이대학(东北大学) 학생이던 류창춘(刘长春)이 처음으로 참가하면서 ‘중국인 올림픽 참가 1호’라는 기록을 쓰게 됐다.

1949년 오늘날의 신중국(新中国) 건국 이후인 1952년 헬싱키에서 열린 제15회 올림픽에는 처음으로 올림픽대표단이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국가로서 중국은 이후 1960~70년대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를 겪으며 세계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중국이 다시 올림픽 국제무대에 손을 내민 건 지금으로부터 30년전인 1978년 개혁개방정책 이후. 
   
 
중국은 지난 2001년 7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재도전 끝에 이번 베이징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당시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올림픽 개최도시로 베이징 결정을 발표하고 있다.


이어 1979년 IOC에 다시 가입했고 1984년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는 225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대표단을 출전시켰다. 중국은 이 대회에서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사격종목에 출전한 쉬하이펑(许海峰)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무엇보다 중국인들은 올림픽 무대에서 금메달 ‘영(零)의 행진’을 멈추게 한 역사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또 52년전 류창춘이 처음 출전했던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이라는 같은 무대에서 첫 금메달을 딴 걸 ‘길상(吉祥)’으로 여긴다.

그리고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치렀던 중국은 본격적인 올림픽 유치준비에 들어갔다.

이어 이듬해인 1991년 12월 베이징은 2000년 제27회 올림픽 유치를 위한 개최신청서를 정식으로 접수시켰다. 그러나 1993년 9월 24일 열린 최종투표 결과는 43대 45. 아깝게 2표차로 시드니에 올림픽 개최권을 내줬다.

그리고는 또 8년이 지난 2001년 7월 13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투표에서 드디어 제29회 올림픽 개최권을 따냈다. 재수 끝에 얻은 영광이었다.

그로부터 지난 7년을 중국은 100년만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그 역사적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번 제29회 베이징올림픽의 3대 이념은 ‘녹색(绿色)올림픽’, ‘과기(科技)올림픽’, ‘인문(人文)올림픽’이다.

때문에 중국은 이번 베이징올림픽을 계기로 경제대국을 넘어 스포츠대국, 세계대국으로 다시 태어날 각오를 다지고 있다./베이징=이건우 통신원

아주경제연구소 기자 ajnews@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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