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가 금융위기 해소를 위해 의회의 승인을 받아 마련한 금융구제안이 한달여만에 진로를 이탈했다.
당초 미 재무부는 의회에 7천억달러의 공적자금을 요청하면서 이 돈으로 금융회사들의 모기지 관련 부실채권을 매입하는데 쓰겠다고 밝혔다.
주택시장의 붕괴로 주택담보대출의 연체가 심화되고 이로 인해 모기지 관련 채권의 부실화로 금융회사들의 신용경색이 초래됐기 때문에 부실채권 인수가 금융위기 수습의 요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불과 5주만에 재무부가 태도를 바꿔 금융회사의 부실채권 매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헨리 폴슨 재무장관은 12일 기자회견에서 "최근 몇주간에 걸쳐 금융회사들의 모기지 관련 부실채권 인수에 따른 효과를 정밀 조사해왔으며, 현 시점에서 금융회사들의 부실채권 매입에 공적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처럼 금융구제안의 목표가 변경된 것은 부실채권 인수의 기대효과가 의문시되는 가운데 더 효과가 빠른 방법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또 한편에서 더 급한 불을 꺼야 할 상황이 생기면서 공적자금의 용처를 돌려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원인이다.
당초 재무부는 금융회사들의 부실채권을 역경매 방식으로 인수키로 했으나, 금융회사별 부실채권의 보유실태를 조사하고 역경매방식으로 인수하는 데 상당한 시일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점이 확인됐다.
특히 부실채권의 인수가격 산정이 간단치 않은데다 자칫하면 헐값에 채권을 인수했다가는 금융회사들의 재무상태를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재무부는 부실채권 인수와 병행해 공적자금 가운데 2천500억달러를 따로 떼어 은행에 직접 자본을 투입하는 방안을 추진한 결과 이 방법이 상당한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돼 당분간 이 방법에 역점을 두기로 했다.
지금까지 50개 가까운 금융회사들이 총 1천720억달러의 자본투입을 승인받았으며 나머지 780억달러도 주인을 찾기 위해 심사작 업이 진행중이다.
미 정부는 은행에 자본을 직접 투입하면 그 대가로 은행의 우선주를 확보한다. 납세자의 세금이 배당금과 함께 원금까지 충분히 회수가 가능한데다, 해당 은행의 경영진에 대해 터무니없는 보너스를 지급하는 관행에도 제동을 걸 수 있다는 것이 이점이다.
은행과 금융소비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도 자본금이 늘면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자기자본비율이 올라가 대출여력이 커지기 때문에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부실채권을 털어내는 것보다 더 나을 수 있다.
폴슨 장관은 이 때문에 부실채권 인수 계획을 폐기하는 대신 은행에 자본투입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자본투입은 시중은행에만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재무부는 은행과 저축기관 이외에 비(非)은행 금융기관에도 자본을 투입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다.
비은행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자본투입을 검토키로 한 것은 자동차할부금융회사들과 신용카드회사들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들 비은행 금융기관들은 은행과 달리 예금을 취급하지 못하면서 대출채권의 유동화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 있으나 최근 채권시장의 경색으로 자금난에 봉착했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는 최근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하면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에 35억달러의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폴슨 장관은 신용카드 대출과 자동차할부금융, 학자금대출 등을 취급하는 비은행 금융회사들에 대해 공적자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가계의 소비지출과 직결된 이 부분이 무너져 내리면 경기침체의 양상이 훨씬 더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요약하자면, 당장 큰 효과가 기대되지 않은 부실채권 인수에 시간과 돈을 들이는 대신, 금융회사에 직접 자본을 투입해 자금경색을 풀고, 신용위기가 심각한 소비자금융 부문에 급한 불을 끄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 재무부가 금융회사의 부실채권 인수 방안을 폐기했다는 소식과 함께 다우존스 지수가 한때 300포인트 이상 급락하는 등 시장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의회가 진통끝에 통과시킨 구제금융안의 기본 목표가 갑자기 변경됨으로써 모기지 관련 채권의 처리에 목을 매던 이해당사자들로서는 뒤통수를 맞은 격이 됐다.
또 정부 스스로 일관성을 상실하고 원칙을 흐지부지 뒤바뀜으로써 시장에 좋지 않은 신호를 던진 것은 악재로 작용할 것이라는 지적도 만만찮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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