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부터 급격하게 악화된 해운 시황의 파고 속에서 전 세계 해운선사들이 생존을 전제로 한 ‘치킨게임’에 나섰지만 정작 국내 선사들은 전투력을 잃고 생사기로에 놓여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세계 1위 선사인 머스크라인(덴마크)을 비롯해 MSC(스위스), 하팍로이드(독일) 등 글로벌 선사들은 저가운임 경영기조를 유지하며 출혈 경쟁을 벌이고 있다.
머스크라인은 올해 초 아시아-북미 노선 컨테이너 운임을 1FEU(40피트짜리 컨테이너 1개)당 1700달러에서 1300달러로 인하했다. 계절적인 성수기인 3분기임에도 이 같은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MSC·하팍로이드 등도 저가 운임 경쟁에 돌입했다. 이들은 사실상 적자를 감수하고 선단을 운용하고 있는 상태다.
이런 출혈 경쟁 탓에 이들 선사들은 최근 대규모 인력 감축 및 자산 매각에 들어갔다. 머스크는 영국 직원 113명을 해고할 계획이며, 에스토니아에 있는 조선소도 팔기로 했다. 이스라엘 해운 선사인 짐도 100여명의 직원을 줄일 예정이다.
심지어 프랑스 최대 선사이자, 세계 3위 컨테이너선사인 CMA-CGM이 '모라토리움(채무상환유예)'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까지 몰렸다.
국적 선사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한진해운·현대상선·STX팬오션·대한해운 등 해운 '빅4'의 올 상반기 영업적자는 1조2000억에 이른다.
비록 국적 선사들은 외국 선사처럼 대규모 인력 감축에 나서고 있지 않지만, 선박이나 컨테이너 매각 등으로 운용자금 마련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게다가 외국 선사들의 저가 공세로 인해 국적 선사들도 섣불리 운임을 인상할 수도 없어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저가 수주에 나설 수밖에 없다.
국내 컨테이너선사 관계자는 "3분기는 계절적인 성수기여서 운임이 상승하는 시기지만, 실제로 화주와 운임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외국 선사들을 의식해 운임을 인상하지 못하고 있다"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 인도될 선박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어 선복 과잉이 지속된다는 것. 선복 과잉이 지속되는 한 해운업계의 출혈경쟁은 계속 될 것으로 관련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김우호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시황분석센터장은 "선사들이 이미 발주한 선박들로 인해 당분간 공급이 수요를 앞서는 상황이 지속될 것"이라며 부정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는 다만 "비운항 선사(용선을 목적으로 선박을 발주한 선사)들이 발주한 선박들은 상황에 따라 인도 지연 및 발주 취소가 될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고 덧붙였다.
◆외국은 '일단 돕자'…한국은 '나 몰라라'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각국 정부 및 대형 화주들은 국가 기간산업인 선사들을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독일 정부는 지난 2일 예산심의회를 열고 하팍로이드 지원을 결정했으며, 이스라엘 화주협회(ISC)는 자국 선사 짐의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고 나섰다.
중국은 정부가 나서서 적극적인 금융 지원으로 자국 선사들을 측면 지원하고 있다. 일본 대형 화주들 역시 지명입찰제를 통해 자국 선사들을 철저하게 보호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상황은 이와는 좀 다르게 흐르고 있다. 정부의 생각대로 시장이나 금융권이 움직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당초 정부가 산업은행 및 자산관리공사(캠코)를 통해 약 6조원 규모의 선박 펀드를 조성해 이 기금으로 선박을 사들여 유동성을 지원하고 구조조정도 함께 진행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생각과 달리 캠코는 시중 은행들의 반대에 부딪쳐 1차 매입 대상으로 선정한 62척의 선박 중에서 지금까지 17척을 사들이는데 그치고 말았다.
한국전력·현대제철 등 국내 대형 화주들 역시 가격 경쟁력에서 앞선 일본 선사들의 응찰을 허용하고 있어 외려 국적 선사들의 설자리만 점점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국적 선사들은 정부와 대형 화주들의 인식 변화를 강하게 요청하고 있다. 글로벌 선사들과의 치킨게임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측면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정부나 대형 화주들 모두가 현 상황을 너무 안이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며 "적극적인 지원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아주경제= 김병용 기자 ironman17@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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