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5-1] 정주영, 뚝심의 전경련 회장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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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7-01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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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일즈 외교… 올림픽 유치 성과 이뤄

   
 
1980년, 전경련 정기 총회 후에(오른쪽 두번째가 정주영 회장). (사진=정주영 박물관)

정주영의 평생에 걸친 도전은 ‘현대’란 틀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행보는 한국의 고속성장기와 맞물리며 국가적인 사업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했다. 1977년부터 1987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회장직을 맡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그는 훨씬 이전부터 정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다. 그 역시 “1970년대 이전까지 정부와의 관계 없이는 사업 자체가 불가능했다”고 회상했다. 정주영이 해외로 눈을 돌린 이유도 정부와의 관계로 성장한 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정부에 도움이 돼 왔다. 아니, 국가의 고속성장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1960년대 첫 해외 사업 진출은 만성적으로 부족했던 달러 획득을 이뤄냈다. 국가적인 대사업 경부고속도로는 ‘무모했던’ 현대가 아니면 해 내기 힘든 일이었다.

돈도 기술도 없이 일궈낸 현대조선소나 현대자동차의 국내 첫 독자 모델인 ‘포니’ 개발, 오일 쇼크에 중동의 오일 머니를 벌어 온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주영이 시작한 대부분의 사업은 ‘시기상조다’, ‘불가능하다’는 식의 숱한 반대에 부딪혔다. 대부분 대기업이 정부의 중공업 육성 정책에도 고민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주영은 선견지명과 강한 추진력으로 중공업의 첫 스타트를 끊었다.

때로는 정부의 반대도 무릅쓰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온 게 그다. 이는 전경련 회장 재임 11년 동안에도 변함 없었다.

   
 
 1980년 전경련 회의장에서. (사진=정주영 박물관)
◆‘세일즈 외교’의 달인= 지난 대통령 선거 때 ‘세일즈 외교’란 말이 유행했다. 이와 함께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말 역시 위기의 한국호에 탄 시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하지만 그 ‘원조’를 따지자면 정주영이 ‘세일즈 외교’의 창시자다.

정주영은 1977년 제13대 전경련 회장직에 취임했다. 전경련은 1961년 이병철 고 삼성 창업주 1대 회장을 시작으로 반세기 동안 한국 재계의 발과 목소리를 대변해 온 대표적인 재계 단체다.

그리고 정주영은 역대 10여명의 회장 중 13대를 시작으로 17대까지 11년이라는 가장 긴 기간 동안 회장직을 맡게 된다. 특히 재임 기간 세계의 중심이 된 미국에서부터 인도 등 신흥 시장까지 전 세계를 무대로 ‘세일즈 외교’를 펼쳤다.

취임 전후로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한미관계였다. 당시 한미관계는 ‘인권 외교’를 주창한 카터 정부와 유신 체제 하의 박정희 정부 사이의 대립으로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갔다.

당시 미 대사는 정 회장에게 자동차 독자 산업을 포기하라는 등 협박에 가까운 회유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우방국이라는 관계를 지켜가는 미묘한 줄타기를 이어갔다.

‘강한 미국’을 주창하며 수퍼 301조 등 강력한 제제 수단을 갖고 한국을 압박한 레이건 정부 시대에 정주영의 한 일화가 있다.

1984년 제임스 젠킨스 대통령 특별 보좌관이 중국 시장과 관련 자문을 구하기 위해 정 회장을 만났다. 정 회장은 이 자리에서 “서해안은 중국과 한나절 거리””라며 “한국을 중국 진출 전초기지로 삼아라”라고 했다.

당시 이 서해안 개발 계획이 실행되진 않았다. 이를 계기로 미국의 통상 압력이 현저히 줄게 됐다.

정주영의 외교관은 명쾌했다. “외교라는 게 별 게 아니거든. 경제교류만 잘하면 외교는 저절로 따라오게 돼 있어.” 전경련 회장 재임 당시 그를 10년 넘게 보좌했던 박정웅 전 전경련 외교담당 상무의 증언이다.

◆5공에 굴하지 않았던 뚝심= 11년 동안 전경련 회장직을 수행하며 정주영이 겪어야 했던 고난 또한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80년 제 5공화국에 의한 사퇴 압박이었다.

1979년 12·12 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은 경제계를 장악하기 위해 전경련 단체장을 자신이 원하는 인사로 채우려 했다. 하지만 정 회장과 전경련 회장단은 ‘대표적인 민간 경제단체가 정부의 의도대로 교체될 순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대기업도 지시 한 번으로 무너져 버릴 수 있는 비상 시국이었다. 하지만 정 회장을 필두로 한 전경련은 정부와 여당에 거슬리는 안건도 소신껏 처리했다.

정 회장은 기업 총수들의 우려를 나타낼 때면 “여러분들이 다 반대했는데 정주영 혼자 우겨 이 안이 채택됐다고 하고 그대로 실행합시다”라고 말하곤 했다.

정주영은 이 기간 동안 신군부의 산업통폐합 조치에 의해 심혈을 기울여 키워 놓은 중장비제조업체 현대양행을 빼앗기다시피 대우에 넘기기는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뚝심은 한결같았다.

   
 
 1981년, 독일 바덴바덴에서 올림픽 유치단과 함께(윗줄 왼쪽 두번째). 모든 사람들이 가망이 없다고 신경도 쓰지 않았던 올림픽 유치를 믿은 사람은 정주영을 비롯하여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를 현실로 이뤄냈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정주영 회장은 전경련 재임 당시 최대 업적 중 하나로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경련 주도 하에 유치한 일을 꼽는다.

1981년 당시 88올림픽 유치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한체육회도 일본이라는 강력한 경쟁 상대를 앞두고 사실상 손을 놓아 버린 상태였다.

정부도 체면치레에 급급해 ‘미운털’이 박힌 정주영에게 사실상 책임을 전가했다. IOC 위원 리스트도 없는 가운데 준비 기간은 6개월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주영은 이번에도 강한 추진력을 발휘해 IOC 위원을 일일히 만났다. 일본이 전시장을 만들자 한국도 만들었다. 일본이 IOC 위원에 시계를 돌리자 한국은 꽃다발과 과일을 보냈다.
 
결국 52대 27표의 승리로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게 됐다.

정주영 회장은 전경련 회장 퇴임식 때 “대한체육회가 포기했던 것을 우리 경제인이 성공시켰습니다. 전경련 재임 중 국가를 위해 한 덩어리가 돼 그렇게 일해 본 것이 내 생에에 있어 가장 기쁜 일이었어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1년,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는 순간의 정주영(맨 왼쪽) 모습. 이날 한국의 올림픽 유치는 대표단 전체를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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