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00년 DNA 5-2] 정주영과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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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7-01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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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오른쪽)과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왼쪽)이 1980년대 한 모임에서 서로 길을 양보하고 있는 모습. 두 회장은 서로 상반된 경영 스타일로 1960~1990년대 한국 경제계의 양대 산맥으로 자리잡았다. (사진=정주영 박물관)

1986년, 정주영 회장은 고희(古稀)를 맞아 고희연을 벌일 때 일이다. 당시 지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던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의료진을 부축을 받아 이 행사에 참석했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물론이다.

이 회장은 이날 정 회장에 백자를 선물하고 정 회장이 답사를 하자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큰 박수갈채를 보냈다.

1915년에 태어난 정주영 회장과 그보다 5년 전 태어난 이병철 회장은 대한민국 해방 이후 국내 경제를 이끌어 온 양대 산맥이었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경영 스타일로 각자 분야에서 세계적인 그룹을 일궈냈다.

정주영 회장은 모든 것을 직관적으로 판단해 즉각적으로 결정해 신사업에 뛰어들었다. 혹자는 이를 ‘정벌경영’이라고 칭한다. 또 항상 현장 최일선에서 현장주의를 부르짖었다.

그에 반해 이병철 회장은 모든 것을 자기 주도 하에 놓고 만사를 심사숙고해 결정하는 황제경영을 주창했다. 이 두 경영방식은 현재도 수많은 기업인들에 의해 곧잘 비교되며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정주영의 일생은 그 자체로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청소년기 네번의 가출, 잡역부, 쌀가게 배달원 등 온갖 일을 거친 끝에 자동차 수리사업을 시작했고, 건설·조선·자동차 등 사업에 차례로 뛰어들었다.

정주영은 항상 현장 최일선에 서 있었다. UN군 묘지에 잔디 대신 어린 보리를 심는 등 매번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며 사업을 이끌었다. 그의 사업이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이병철은 가난한 정주영과는 달랐다. 대지주의 아들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토지 300석을 물려받아 정미사업과 토지사업을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두 사업 모두 실패로 끝났지만 그 때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황제경영’의 토대를 쌓기 시작한다.

그는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통해 “사업을 할 때는 국내외 정세 변동을 적확하게 통찰하고 자기 능력과 한계를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직관력을 갖되 제2, 제3의 대비책을 강구해 실패라고 생각하면 깨끗이 청산해야 한다”고 당시 얻은 교훈에 대해 말하고 있다.

실제 삼성은 현재 주력 사업 중 하나인 반도체 사업에 뛰어드는 데 무려 8년 동안의 분석 기간을 거쳤다. 그리고 결국 세계 최대의 반도체 회사로 성장했다. 그는 이 같은 신중함으로 불과 50년 동안 총 44가지 사업을 성공시켰다. 성공률이 무려 96%에 달했다.

한편 이병철 회장은 정주영 회장의 고희연 직후에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정주영 회장은 그 후 13년 이 회장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일궈낸 범 삼성그룹과 범 현대그룹은 지금도 재계 1, 2위를 다투고 있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상반된 경영 방식은 경영 철학으로 남아 수많은 경영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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