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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100년 DNA 11·1] 정몽구, 자동차에 첫 발 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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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08-18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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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아자동차는 지난 2009년 464만대를 판매, 글로벌 점유율 7.8%로 도요타·폴크스바겐·제네럴모터스 등에 이어 글로벌 톱5 자동차 브랜드로 올라섰다. 올 상반기에도 총 276만8254대라는 역대 최대 실적으로 글로벌 톱4를 향한 고공 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올해 목표는 540만대다. 하반기 그랜저, 아반떼, K5, 스포티지R 등 신차가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이상도 충분하다.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은 이달 초 미국 공장을 방문해 “조만간 연 600만대 이상 판매를 목표로 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현대기아차그룹 전체로도 올 4월 현대제철 고로 제철소 1기 완공으로 철강-부품-자동차로 이어지는 자동차 일관체제를 갖췄으며, 부품 계열사 현대모비스도 매출 10조원을 넘어서는 등 전 계열사가 힘을 얻고 있다.

이 같은 성과는 1976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포니 정’으로 불렸던 고(故) 정세영 명예회장이 첫 국산 자동차 ‘포니’를 내놓은 지 33년 만이다.

지난 2000년 9월 현대그룹과의 계열 분리 당시 10개였던 계열사 수도 완성차·부품사·철강사·금융사·기타 회사를 포함 총 41개로 늘어났다. 총 자산도 34조390억원에서 86조9450억원(2009년 4월 기준)으로 늘었다. 이에 따라 재계 순위도 5위(공기업 제외)에서 삼성그룹에 이어 2위로 올라섰다.

매출액도 국내 사업장 기준으로만 94조6520억원으로 올해 꿈의 100조원 돌파도 가능하다. 해외 연결 기준으로는 이미 100조원을 훌쩍 뛰어넘은 상태다.

이 같은 변화에는 ‘왕회장’(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닦아 놓은 기반을 잘 이어받은, 또 이를 더 발전시킨 정몽구 회장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다.

◆왕회장의 둘째, 정몽구 회장= 정몽구 회장은 1938년 강원도 통천에서 8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장남 정몽필 전 인천제철 사장이 1982년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30년 동안 사실상 장남 역할을 해 왔다.

정몽필·정몽윤 등 일찍 세상을 떠난 형제를 제외한 8명 중 가장 아버지를 닮았다. 우직한 외모, 어눌한 말투 속에 불굴의 의지와 판단력은 아버지를 쏙 빼 닮았다는 게 전직 임원 등 지인들의 평가다. 장남 역할을 하며 키워진 책임감은 왕회장과 더 ‘닮은꼴’이 되는 계기가 됐다.

어린 시절 정몽구는 정주영의 엄격한 교육 탓에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재벌답지 않은 평범했다. ‘영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왕회장의 교육 방침상 대학 졸업 후 2년 동안 미국 코네티컷 대학서 공부하기도 했지만 경복고, 한양대 공업경영학을 전공한 게 정식 교육 과정의 전부다.

참고로 정주영 명예회장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미군 통역장교 출신인 동생 정인영 전 한라그룹 회장 덕분에 미군 부대 발주 공사를 도맡게 되며 임원을 선발할 때도 영어 실력을 중요시했다. 이는 자녀 교육 때도 마찬가지다. 9남매 모두 길게든 짧게든 미국 유학을 간 경험이 있다.

정몽구 회장은 대신 대학 졸업 후부터 현장 경험, 특히 자동차에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 유학 시절 미국 현지 자동차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게 자동차와의 첫 만남이었다.

   
 
지난해 말 중국을 방문해 실제 차량을 타보고 있는 정몽구 회장 모습.

실제 정 회장은 첫 사업으로 자동차 수리를 했던 아버지 정주영과 마찬가지로 기계, 특히 자동차에 대해서는 엔지니어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다. 정 회장은 현대기아차 신차가 나올 때마다 시승한 후 세세한 부분까지 지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까닭에 아무리 임원이라 하더라도 실제 자동차를 만질 수 없는 사람들은 혼쭐이 나기 일쑤다.

그는 고등학교 때 럭비를 즐겼다고 한다. 어쩌면 우직하게 조금씩 앞으로 전진하는, 때로는 전략을 통해 일거에 점수를 따 내는 럭비가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스포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직원 113명 현대차써비스 대표 되다= 정몽구 회장은 1970년 2월 현대자동차 서울사무소 과장으로 첫 ‘현대맨’이 됐다. 그리고 그 이듬해 정주영 회장의 애프터서비스(AS) 사업 분리 지시로 1974년 설립된 현대자동차써비스 대표이사 사장에 올랐다. 그의 나이 37세 때였다.

5남 정몽헌 회장은 30세 때 주력 계열사인 현대건설 이사를 거쳐 34세에 현대상선 대표이사에 올랐다. 6남 정몽준 회장도 31세에 주력 계열사 현대중공업 대표에 오른 것과 비교하면 결코 빠른 행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답게 한걸음 한걸음 씩 아버지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그의 경영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왕회장 역시 1940년 자동차 서비스를 자신의 첫 사업으로 택한 바 있다. 그 왕회장이 둘째 정몽구 회장에게도 역시 같은 길을 가도록 지시한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현대자동차써비스는 현대건설·현대중공업과는 달리 직원 113명의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그만큼 정 회장의 재량을 마음 껏 펼칠 수 있는 여지는 많았다. 그리고 실제 정 회장은 이 곳에서 왕회장에게 자질을 인정받고, 현재의 현대기아차그룹을 이끌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정 회장은 취임 후 “서울·부산에 설치된 직영 공장과 부품 판매 대리점, 지정 정비공장 등 전국 60개 지방 서비스 조직망을 1974년 한 해 동안 100개로 늘리겠다”고 말했다.

또 “운영이 부실해서도 안 되겠지만 흑자 운영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말은 부품을 밖으로 빼돌리거나 빠른 수리를 위해 돈을 주는 ‘검은 수수료’ 관행을 뿌리뽑겠다는 그의 의지였다.

정몽구 회장은 1972년 현대차에 입사하던 해 같은 회사 부품 유통을 맡던 직원이 부품 판매비를 빼돌리며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그는 여기에 연루되며 잠시나마 현대조선 자재부로 옮겨가야 했다. 이후 그는 지금까지 부정부패와 관련한 인물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히 다루고 있다.

정몽구 회장은 직원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는 소탈함과 대졸자 사원-현장정비공으로 이원화 된 신분을 하나로 통합하는 등 내부 개혁, 전국 순회 정비 등 대내외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그 결과 회사는 사업 첫 해 매출 31억원, 순이익 2억6000만원을 기록했다.

◆컨테이너·첫 완성차 성공 이끌어= 그의 도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현대차써비스게 제 궤도에 오론 1975년부터 정 회장이 그룹 회장을 맡게 되는 1995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컨테이너·완성차 사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며, 자신의 경영 능력을 대외적으로 공고히 했다.

1975년 왕회장의 사업 확장 지시에 따라 현대차에 필터를 납품하던 대신양행을 인수했고, 그 이듬해는 밸브 및 컨테이너 사업에 뛰어든다. 그 중 컨테이너 사업은 1977년 고려정공(현대정공)을 인수한 뒤 현대차써비스와는 분리된다.

1979년 전 세계적인 오일 쇼크로 경영에 빨간불이 켜지자 현대차써비스는 전국에 깔린 애프터서비스망을 기반으로 자동차 판매 사업을 준비하고 1982년부터 본격적인 판매에 나선다.

이후에도 현대차써비스는 현대중공업이 생산하는 중장비 판매권(1988년), 현대정유 석유판매사업권(1994년)을 차례로 따내며 종합 유통사로 거듭나게 된다.

한편 정몽구 회장은 1987년 현대정공의 컨테이너 사업이 한계에 다다르자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바로 ‘갤로퍼 프로젝트’였다. 완성차 사업은 정몽구 회장이 정비사업을 할 때부터의 꿈이었다.

1988년 유기철 당시 현대정공 사장에게 소위 지프차로 불리는 사륜구동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을 지시했다. 당시 현대차는 SUV 차량이 없었고, 국내 시장은 쌍용차 코란도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정주영 역시 정몽구의 자동차 시장 진입을 격려한 것으로 알려진다.

‘X-100’ 프로젝트로 명명된 이 사업은 초창기부터 시장성이 없다는 평가 속에서 좌초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정몽구 회장은 그 대안으로 일본 미쓰비시 파제로 엔진 도입으로 개발비를 줄였고, 1991년 10월 갤로퍼를 출시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출시 첫 해 1만6000대가 판매되며 쌍용차를 제치고 1위로 올라섰고, 그 이듬해는 2만5000대로 시장을 강타했다. 정몽구 회장 개인에 있어서도 정주영 명예회장이 동생 정세영이 맡고 있던 자동차 사업을 정몽구에게 넘겨줘도 괜찮겠다는 확신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아주경제 김형욱·김병용·이정화 기자) nero@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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