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세의 간웅(奸雄)' 조조 다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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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0-11-0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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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曹操.155~220)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간사하고 잔혹하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조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남송 때 주희가 편찬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명나라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영향이 크다.

   최근 국내에 번역 출간된 조조 연구의 권위자 장쭤야오(張作耀)의 '조조 평전'은 다양한 사료에 근거해 조조를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다.

   '한서(漢書)'와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진서(晉書)' '자치통감(資治通鑑)' 등 정통 역사서에 근거해 조조의 온전한 면모를 새로 그리려고 애썼다.

   후한 말 환관 조등이 양자로 맞은 조숭의 아들인 조조는 궐문 수비를 담당하는 직책인 위(尉)였던 시절, 황제가 총애하는 환관의 숙부가 야간통행금지 규정을 어기자 가차없이 죽이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서른넷의 나이에 도위에 임명되면서 뜻을 펼치기 시작했고 동탁을 토벌하면서 시작된 그의 이후 행보는 잘 알려져 있다.

   역사서에 나타난 전략가로서 조조의 첫 걸음은 인재 기용이었다. 사람을 쓸 때 오직 재능만 기준으로 삼았고 특정한 틀에 얽매이지도 않았다.

   직무에 맞는 개인의 장점이 중요할 뿐 그 외의 사람됨이나 직무와 관련 없는 단점은 문제가 안 된다는 게 조조의 생각이었다.

   인재들이 능력을 십분 발휘하도록 자유롭게 의견을 낼 것을 독려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도 귀담아들었다. 뛰어난 계책을 내놓으면 후한 상을 내렸다.

   이런 용인술은 신하들을 고무시키고 그를 믿고 따르게 하는 힘의 근원이었다. 조조의 사공 군모, 승상 연속 등 위나라 건국 공신들은 모두 이렇게 발굴하고 기용한 인물이었다.

   반면, 조조는 의심이 많아 항상 남을 시험했다. 또 교만하고 경솔한 성격을 쉽게 드러내 성급하게 일을 처리하거나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간사하고 교활하며 사람을 쉽게 죽이기도 하는데 역사상 그에게 쏟아진 비판은 이런 성격 때문이었다. 특히 '내가 남을 저버릴지언정 남이 나를 저버리게 하지 마라'는 신조는 극단적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지난날의 악연은 염두에 두지 않는다"며 자기 아들을 죽인 장수를 기용하는가 하면 한 번 눈밖에 나면 반드시 보복을 하고 아무리 출중한 인물도 자신이 쓸 인재가 아니면 망설임 없이 제거하는 이중적 행보를 보였다.

   조조는 창조적인 경제 정책으로 중국 역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한나라 말기에 경제가 쇠퇴하는 가운데 호족들의 토지겸병으로 백성들의 빈곤이 갈수록 심해지자 토지독점을 막고 조세제도를 혁신했다.

   농지 면적에 따라 징수액을 계산하고 호구에 따라 비단과 솜을 징수한 정책은 조조제(租調制)의 시발점이 됐다. 징수량을 명확히 규정한 조조제는 중국 조세제도의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어려서부터 여유롭게 자라면서 자유롭게 노는 것을 좋아했던 조조는 수준 높은 작품을 남긴 문학가이기도 했다.

   생활 속에서 학문과 문학을 쉽게 접했던 그는 시문에 애정을 갖고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임으로써 악부(樂府.한시 형식의 하나)의 전통을 계승하고 새로운 형식의 사언시를 탄생시켰다.

   저자는 "조조의 교활함과 잔인함, 포악함은 비난받아 마땅하다"면서도 "사람들은 처음에는 조조를 욕하지만 결국에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이자 정치가이며 사상가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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