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수교전인 1990년 초반의 일이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신의주와 마주한 중국 단동 지역에 처와 함께 여행가서 저녁에 여관을 찼았더니 카운터 여직원이 여권을 확인한뒤 부부증명서를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영문을 몰라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그런거 없다”고 하자 직원 말이“ 부부증명서가 없으면 남녀가 함께 투숙할수 없으니 다른 곳에 가보라”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들이 요구한 부부증명서란 가족관계를 나타내는 주민등록등본과 같은 것이었는데 해외 여행때 이런걸 떼어갈리 만무하지 않는가.
방을 두개 얻어 각자 투숙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불편한 것도 그렇지만 이 역시 호텔안의 감시원들에게 걸려들면 괜히 불법 성 매매로 오인받아 낭패를 볼 수 있다는 얘기였다. 빈관(宾館)과 판덴(飯店)이라고 이름 붙은 숙소를 무수히 찾아다녔지만 한결같이 똑 같은 이유로 투숙을 거절했다.
당시 우리가 묶으려던 호텔은 신의주와 사이에 압록강 철교가 바로 아래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었다. 단둥 기차역에 돌아 가서 노숙이라도 해야하나 걱정하고 있던 순간 옆에서 쭉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이 우리 형편을 짐작하고 주변 학교의 유도부 기숙사로 우리를 데려가 재워줬다. 사투리로 봐 이 사람은 조선족 교포라기 보다는 북한 사람이 아니 었을까 싶다.
다음날 승용차로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근처에 있는 푸순(抚顺)이라는 도시를 찾았다. 제법 규모가 큰 국유 화학 공장이 들어서 있었고, 공장에서 한 2㎞ 떨어진 곳에는 공장 직원들의 공동 주택 단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얕으막한 야산에 접한 마을에 도착하자 광장에 수백명의 선남선녀들이 모여 포크 댄스를 즐기고 있엇다.
처음엔 무슨 공연이 열리나 보다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공장 직원들이 일과 후 광장에 모여 여가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사이에서는 남녀 누구나 춤을 잘 추는 것은 아주 큰 자랑이라고 했다. 이 때문인지 읍내 이곳저곳에 많은 댄스 교습소가 생겨나 성업중이었다.
“춤 잘 추는 남자는 여성들한테 인기가 높아요. 현장에서 남남끼리 눈이 맞아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는 일도 잦아요. 일과 후 포크댄스는 거의 유일한 여가활동인데 풍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중단시킬수 없는 노릇이지요. 탈선의 부작용도 있지만 남녀간의 문제를 나라가 간섭하는 것도 옳다고 할수 없지요.”
해가 중천에 걸려있는 한여름 오후 5시 익숙치 않은 집단 주택촌의 군무가 신기했는데 동행한 안내원이 눈치를 채고 재빨리 궁금증을 풀어줬다. 그는 춤추는 사람들은 부부나 가족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실족(失足 탈선을 뜻함) 남녀’들도 있다고 귀뜸했다.
부부증명서 얘기를 꺼냈더니 안내원은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하려는 사회주의 시절 잔재이기도 하고 요즘들어서는 매매춘을 비롯해 풍습이 문란해지는 걸 방지하려고 그런 제도를 시행하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야산이든 어디든 연인들이 마음만 먹으면 낭만을 즐길수 있는 곳이 왜 없겠어요” 한참 설명 끝에 씩 웃는 모습으로 안내원이 말했다.
오랫동안 통제와 억압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성 의식과 관념도 폐쇄적일 거라는 당초 생각은 한참 잘못된 거였다.
시간이 더 지나서 알게 됐지만 중국인들은 세상 누구보다 성에 대한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그랬다. 사회주의 이념적 올가미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체제개혁및 대외개방이라는 사회변화의 물결속에서 급류처럼 빠른 속도로 성에 대한 금기의 장막을 걷어올리기 시작했다.
*사진설명 -- 베이징 외곽의 한 공원에서 최근 열린 대형 락뮤직 페스티벌에서 한 여성 팬이 유니온잭으로 만든 핫팬츠를 입고 색다른 방식으로 구애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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