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공산당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호자인 동시에 사회주의 현대화를 완수할 책무를 떠맡은 수권 정당이다.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은 역사의 물줄기를 거역하는 것이다.'
마치 당원 선서라도 하듯 중국 공산당원인 베이징의 지인이 즐겨 하는 말이다. 중국 공산당은 '막중한 역사적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세상 어떤 조직보다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당의 발전을 막는 모든 요소를 벗어 던졌으며 이데올로기의 대척점에 있던 공자까지 끌어안는 유연성을 발휘했다.
중국 공산당은 지난 1999년 헌법에 사유재산 보호조치를 명문화 했다. 또한 자본가의 공산당 입당까지 허용함으로써 세상을 놀라게 했다. 지난 1978년 개혁개방 무렵 일부 사영기업가들이 공개처형 됐음을 감안할 때 천지개벽과 같은 조치다.
그것은 흡사 어떤 종교가 교리를 바꾼 것 처럼 혁명적인 변화라고 할수 있다. 마찰이 있을 법도 하지만 중국에서 이 모든 일들은 별 저항없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중국 공산당은 마치 당의 존재만 부정하지 않는다면 뭐든지 수용하고 어떤 실험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외치는 듯하다.
중난하이(中南海)와 베이하이(北海) 호수를 가르는 베이징 시내 원진제(文津街)의 아담한 다리. 베이하이 호수에는 주민들의 뱃놀이가 한창이고 청와대와 같은 곳인 인근 중난하이에도 따사로운 봄볕속에 수양버들잎이 싱그럽다.
지난 2007년 봄 한국 방문을 앞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를 취재하기 위해 찾은 중난하이. 중난하이는 베이징 8대 경관중 하나로 베이하이와 함께 명청시대 왕실정원에 속했던 곳이다.
8개 대문 가운데 시베이(西北)문을 통해 들어갔는데 예상보다 경비가 한산하다. 군사정권 시절 인근에 얼씬도 못했던 우리 청와대를 회상하자 왠지 실소가 머금어졌다.
‘중난하이’는 중국 공산당의 대본영과 같은 곳으로 당정 최고 지도자들의 주택과 집무실이 사합원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최고 권력집단인 공산당 중앙위도 이곳에 있다.
왕조시대의 자금성이 그랬듯 중난하이는 중국 현대사에서 음모와 계략, 밀실정치가 횡횡하던 곳이었다. 1970년 전후 문혁기에는 황제보다 더한 그 곳 절대자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명운이 갈렸다. 당시 이곳에선 ‘입이 있어도 묻지 말고, 귀가 있어도 듣지 말라’는 얘기가 불문율이었다.
그러나 중난하이에도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닥쳤다. 마오저뚱(毛澤東)의 소름끼치는 ‘안가’ 쥐샹수우( 菊香書屋)는 표만 사면 구경할수 있는 곳이 됐다. 문혁의 상흔은 사라지고 권모술수 보다는 개방적 ‘정치 1번가’의 분위기로 탈바꿈했다.
“공산당이 아무리 노력해도 일당 독재체제라는 한계를 벗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언젠가 상하이 국유기업에 다니는 공산당원 수(蘇)모씨에게 중국 체제에 대해 다소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해외통인 수씨는 한국 출장을 다니면서 느꼈던 생각을 털어놨다. “처음 한국을 찾았을 땐 맑은 한강과 깨끗한 거리가 인상적이었어요. 그 다음에는 지도자를 직접 국민이 뽑는 정치풍토가 부러웠어요.”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어요” 수씨는 한참동안 무슨 생각에 잠긴듯 하더니 나를 향해 불쑥 “당신은 한국정치의 경쟁 포인트가 뭐라고 생각하죠?”라고 물었다. 그러더니 그는 다시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한국엔 정치적 자유가 있지만 국회운영 등을 보면 민주적 가치가 존중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나의 한국 친구들은 정치하면 짜증부터 냈습니다. 중국은 선거제도엔 제약이 있지만 공산당의 의사 결정은 대체로 정확하고 시스템도 효율적이지요. 중요한 것은 인민들이 각자 자국의 정치에 얼마나 만족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마오쩌둥은 동기가 아무리 훌륭해도 결과가 나쁘면 그 동기를 좋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어요,”
그는 명확하고 속시원한 대답을 듣고 싶다는 듯 물끄러미 나를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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