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김선환 기자)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입안하던 1971년 3월. 당시 경제기획원 주도하에 이뤄지던 개발계획이 심각한 문제에 봉착했다. 1차 경제개발 성공신화로 7% 이상 성장을 구가할 당시임에도 우리나라에는 변변한 경제연구소 하나 없었던 시절, 중장기 계획은 그런대로 짤 수 있었지만, 이를 세부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정책연구는 꿈도 못 꾸었다. 이 같은 목마름이 급기야 한국개발연구원(KDI) 설립의 모태로 작용하게 됐다.
당시 초대 원장으로 취임한 김만제 전 부총리는 37세라는 나이에 국내 최초이자 최고의 ‘싱크탱크’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미주리 대학 경제학박사 출신에다 KDI 설립자금을 댄 미국 원조기관인 USAID/K(국제개발처)에 근무하면서 쌓아온 폭넓은 인맥이 10명의 박사급 수석 연구원들을 무리 없이 스카우트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애국심만을 강조해서는 쉽사리 뜻을 펼치기가 어렵다고 판단해 설립자인 박정희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20대 후반 연구원들에게 대학교수보다 서너 배 많은 보수를 주고 무상 아파트를 제공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제시했다.
◆ 불혹 맞은 KDI…한국경제 성장 동력
서울 홍릉에 위치한 지금의 KDI가 11일로 창립 40주년을 맞이한다. 인간의 생애로 치면 웬만한 일에는 유혹받지 않을 나이인 ‘불혹(不惑)’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이 기간 동안 초대 김만제 원장부터 13대 현오석 현 원장까지 국내 최고석학들이 지휘해 온 KDI는 이제는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싱크탱크’로 거듭났다.
지금이야 국책연구기관으로서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위치에 올라섰지만 60년대 후반에는 설립 자체가 물 건너갈 수 있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미국의 원조자금에 의지하던 당시 록펠러재단이나 포드재단으로부터 설립자금지원을 거부당하는 등 말 못할 설움을 겪어야 했다.
김만제 전 부총리는 지난 2002년 원 창립 30주년을 맞아 KDI를 거쳐 간 연우회 출신들로 ‘홍릉 숲 속의 경제 브레인들’이라는 야사(野史)를 엮어 원 설립 당시의 험난한 과정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김만제 부총리는 글에서 “당시 세계적으로 명성 있는 연구소가 선진국에 많이 있었지만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곳이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브루킹스연구소(Brookings Institution)”이었다며 “고도성장을 이루어 낸 정부의 배후에는 정부의 경제개발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KDI의 노력이 있었다”고 술회했다.
여러 연구성과가 있지만 이 가운데에서도 1986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마련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이후 정부의 기업집단 및 경쟁정책에 스며들었다.
70-80년대 군사정부를 기반으로 한 관 주도의 개발경제시대는 90년대 문민정부의 출범으로 상당 부분 시장에 주도권을 빼앗기게 돼 KDI의 역할에도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된다.
세계화라는 큰 시대적 조류 속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과제에 직면한 것. 특히 개방화와 자율화를 포함한 금융개혁 과제와 금융산업 발전을 위한 해법 찾기에 주력해 1998년 4월 내놓은 ‘경제위기 극복과 구조조정을 위한 종합대책’ 보고서가 호평을 받기에 이른다.
사회문제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인구·고용·문화·여성 등에 이르는 기초통계 정비방안을 연구해 사회지표 체계를 대폭 확대 개선하는 성과를 거뒀다. 북한 연구를 본격화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KDI는 북한경제의 실상, 경제협력 연구를 통해 당시 남북경제회담과 이후 남북 고위급회담 관련 정책수립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부실기업정리와 기업지배구조 등 기업부문 연구, 경제위기로 중요성이 높아진 사회안전망과 재정건전성 연구 등도 주된 관심사였다.
2000년대 들어 KDI는 해외로 시선을 넓혀갔다. 세계은행(IBRD),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와의 공동연구를 강화했다. 또 저출산·고령화가 심각한 국가적 위기요인으로 지목되면서 중장기 정책과제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결과로 KDI는 지난달 미 펜실베니아대학의 ‘싱크탱크와 시민사회 프로그램’이 선정한 세계 75대 선도적 싱크탱크로 선정됐다. 아시아 지역 1200여개 싱크탱크 중 최고의 경제분야 연구소로, 국제개발 분야에서는 세계 22위 연구소로 꼽혔다. KDI의 모델이 됐던 브루킹스연구소가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것은 원 설립당시 추구해 왔던 방향이 옳았음을 방증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 세계적 싱크탱크로 성장…새로운 도전에 나서야 할 때
KDI는 현오석 원장이 취임한 이후 조직개편을 단행, 지금은 본원과 대학원, 경제정보센터·공공투자관리센터·국제개발협력센터 등을 합해 총 292명의 임직원을 둔 거대 연구소가 됐다. 박사급만 100여명을 헤아린다. 본원과 대학원을 합해 지난해 연구사업비로만 590억여 원을 집행한 거대기관으로 성장했다.
기획재정부와 함께 KSP(경제개발공유경험)베트남, 카자흐스탄 등 30여개 저개발 및 신흥개도국들에게 우리의 발전과정을 전수하는 작업도 하고 있다. 지난 2월엔 포르피리오 로보 소사 온두라스 대통령이 방한단을 이끌고 한국경제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해온 KDI 홍릉본원을 직접 찾아왔을 정도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을 맞긴 했지만 적잖은 도전도 산적해 있다. 오는 2013년 세종시 이전을 앞두고 대학 등으로의 이탈 등 현실적인 문제와 함께 시대상황에 맞는 정책연구 및 전략구상을 추구해야 하는 숙제가 부여됐다.
현오석 원장은 “1년 전부터 대학교수를 KDI 겸임연구원으로 채용하는 등 기존 대학들과의 연계연구를 강화해가고 있다”며 “세계경제상황에 맞춘 선제적 연구·학제적 연구·글로벌 시각에 맞춘 정책 등을 추구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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