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통신은 21일(현지시간) 미 정부는 지난 수년간 강달러 기조를 고수했지만, 최근 달러화 가치가 급락하고 있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 재무장관은 지난해 11월 강달러 기조를 확인한 이후 지금까지 달러화 가치에 대한 말을 삼가고 있다. 그는 당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재무장관 회의가 열린 일본 교토에서 "미국은 결코 달러화를 (수출) 경쟁력 강화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달러화 강세가 미국의 이익이라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 달러화 가치는 추락 일변도였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Fed)가 기준금리를 제로(0) 수준에 묶어둔 채 6000억 달러어치의 국채를 사들이는 2차 양적완화(QE2)에 나선 데다 미 정부의 재정적자가 악화된 탓이다.
최근 6개월간 달러인덱스 추이(출처:CNBC) |
일각에서는 미 정부가 경기회복을 위해 소극적으로 달러화 약세를 용인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앨런 시나이 디시전이코노믹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미 정부나 고위 인사들은 아직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지만, 미 정부는 사실상 달러화 약세를 용인하고 있다"며 "달러화 약세의 중심에는 연준이 2년 넘게 유지해온 대규모 양적완화 정책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제로금리를 제공하고, 경제성장률이 중국의 3분의 1에 불과한 상황에서는 투자자들이 달러화를 살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6개 주요 통화 대비 달러화 가치를 반영하는 달러인덱스는 이날 2008년 8월 이후 최저치인 73.735까지 떨어졌다. 올 들어서만 6.2% 추락했다. 유로·달러 환율은 1.46 달러선을 돌파했다. 시장에서는 달러인덱스가 2008년 3월 기록한 사상 최저치(70.698)에 이를 날도 머지 않았다고 관측하고 있다.
데이비드 길모어 FX어낼러틱스 애널리스트는 "미국이 (경기회복을 위해) 수출 확대에 집중할 게 뻔한데, 수출을 늘리려면 달러화 약세가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세계 최대 수출국인 중국에 끊임 없이 위안화 절상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수출에 목매고 있는 남미와 아시아지역 신흥국들이 미국을 비난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이 세계 인플레이션을 심화시키고, 불균형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것이다.
기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수출을 늘리고, 신흥시장과의 무역불균형을 줄이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로이터는 최근 기업들의 실적호조로 미국 증시가 호황을 이어가고 있는 것도 달러화 약세로 미국의 제약·화학·식품기업들이 수출을 늘린 결과라고 풀이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 참여했던 한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이 적극적으로 달러화 약세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금리 정책과 공격적인 통화부양 정책이 달러화 가치를 떨어뜨린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6개월 30년 만기 美 국채 수익률 추이(%/출처:파이낸셜타임스) |
문제는 소극적인 미국의 약달러 용인 정책에 위험요소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달러를 찍어 국채를 매입하는 양적완화 프로그램은 달러화 가치 하락을 가속화할 수 있다. 달러화 가치가 떨어지면 저렴한 달러 자금이 상품시장으로 흘러들어 원유를 비롯한 상품가격을 띄어올리게 된다. 오바마 행정부는 투기세력이 국제유가 급등세를 부추기고 있다며 범부처 특별조사팀을 구성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점진적인 달러화 약세가 문제될 게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미 싱크탱크인 페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프레드 버그스텐 이사는 "미국이 경제성장을 위해 채무에 허덕이고 있는 소비자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수출에 기대기로 한 만큼, 미국 안팎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데는 달러화 약세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그는 달러화가 2008년 금융위기 때 잠깐을 제외하고 2002년부터 9년간 약세를 띤 것은 글로벌 환율시스템 균형에 상당한 조정이 이뤄지고 있다는 의미라고 풀이했다.
어쨌든 전문가들은 달러화의 약세가 이미 추세로 굳혀졌다는 데 공감하고 있는 분위기다. 불어나고 있는 미 정부의 재정적자가 쉽게 해소되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 최대 채권 펀드 핌코의 모하메드 엘 에리언 공동 최고투자책임자(CIO)는 "미국의 재정·통화정책은 지속적인 달러화 가치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품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도 "미 국채 수익률이 현 수준에서 더 오르면, 투자자들은 점차 미 국채 매입 중단에 나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투자자들은 언젠가 30년 만기 미 국채를 3~6%의 수익률로 매입하는 것이 터무니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날 30년 만기 미 국채 수익률은 4.4674%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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