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시대 핵심100인]<30>자오러지 – 공청단파 중국 서부인맥 선두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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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1-07-11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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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과학적 발전과 인민의 행복 추구. 이 두가지는 자오러지(趙樂際) 산시(陝西)성 서기가 공식적인 발언을 할때면 수차례씩 반복하는 단어들이다. 후진타오(胡錦濤) 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를 정점으로 하는 공청단파의 서부인맥 핵심 인사답게 자오러지는 후 주석이 제창하는 두가지 경제개발 아이콘을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닌다. 또한 후 주석의 비전을 충실히 현실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지난 1월 산시(陝西)성 인민대표대회에서 지난해 산시성 경제운용의 성과를 발표하던 자오러지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쳐났다. 이 자리에서도 역시 그는 과학적 발전관과 행복지수를 강조했다.

우선 자오 서기는 “지난해 산시는 의미있는 방점을 찍었다. GDP총량이 최초로 1조위안을 넘어섰으며, 1인당 평균 GDP가 4000달러를 넘었다. 재정소득은 1800억위안, 재정지출은 2220억위안이었으며 이중 1600억위안의 지출이 민생에 투입됐다”고 1년의 성과를 소개했다.

이어 그는 “경제성장의 속도도 중요하지만 발전의 성과를 광범위한 인민대중에 미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인민들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정신적인 풍요를 가져다 주고, 끊임없이 행복지수를 높여야 한다”고 정책방향을 제시했다. 이를 위해 자오 서기는 “공정한 정의의 법치 환경, 조화롭고 안정된 사회 환경 및 풍요롭고 건강한 정신문화를 창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인민이 더욱 더 행복하도록, 인민들의 존엄성이 더욱 귀하게 지켜지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경제성장률과 산업구조조정을 제창하는 중국 연안지역의 지도자들과 달리 그의 정책방향은 다분히 인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베이징대학 철학과를 졸업한 만큼 그의 지도자로서의 비전은 인간에 대한 이해에 기초해 있다.

그가 칭하이(靑海)성 서기를 역임하던 2006년의 발언에도 그의 일관된 생각이 묻어 나온다. 그해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그는 “칭하이성은 소득도 적고 여러 가지 조건도 안 좋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항상 즐겁게 하려 합니다. 높은 고원에서 마음까지 유쾌하지 못하면 병을 얻기 쉽지요”라고 운을 뗀 뒤 기자들에게 “칭하이성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지만 각 소수민족과 촌락, 가정이 모두 조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칭하이성, 산시성에 커리어 집중돼

일견 정신적인 지도자의 풍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그는 경제발전에도 상당한 실적을 드러냈다. 칭하이성 서기를 역임하던 5년동안 칭하이성의 GDP를 두배로 끌어올렸으며, 산시성 서기를 지내는 동안 2009년(13.6%)를 제외하고는 모두 GDP 성장속도 14%를 넘겼다. 1957년생으로 18대 전국대표대회가 열리는 내년이면 나이가 55세인 만큼 연령상의 우세도 점하고 있다.

그의 커리어상 약점이라면 전체 공직생활을 칭하이성과 산시성에서 했다는 것이다. 중앙에서의 활동경험이 없으며, 지방경험도 두개의 성에 국한돼 있는 만큼 운신의 폭이 좁을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 중앙이 서부지역 개발정책을 우선시하고 있는 만큼 서부출신인 자오 서기가 지역안배를 받을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자신의 단조로운 커리어를 충분히 커버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그는 공청단파 좌장중 한명으로 후진타오 주석의 깊은 신뢰를 얻고 있어 내년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국위원으로의 승진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공청단파로 분류되는 그는 1980년부터 1984년까지 칭하이(靑海)성 상업청에서 공청단 서기를 지냈다. 하지만 당시 칭하이성 공청단 서기가 아닌 상업청의 공청단 서기를 역임한 만큼 공청단파의 색채가 강한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는 이후 뚜렷한 실적을 보이며 후 주석의 강력한 지원하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온 만큼 공청단파의 좌장으로 불린다.

그가 칭하이성 성장에 올라선 2000년 1월은 그의 나이가 불과 43세 때였다. 당시 전국 최연소 성장이었다. 후진타오 주석이 총서기직을 승계한 2002년의 이듬해인 2003년 그는 칭하이 서기로 승진했다. 역시 전국 최연소였다. 공청단 제1서기로 있다가 43세에 성장을 거치지 않고 구이저우(貴州)성 서기에 곧바로 임명된 후진타오보다는 세 살 늦었지만 리커창보다는 한 살 일찍 성서기에 오른 것.

◆’용의 허리’ 명당자리가 조적

조적(祖籍)이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인 그는 1957년 칭하이 성도인 시닝(西寧)에 태어났다. 자오서기의 아버지의 고향마을인 시안 주바(竹笆)시는 풍수지리상으로 탁월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대나무 수공제품으로 유명한 그 곳은 현재 역사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다. 이 곳은 풍수지리적으로 용의 허리에 해당되는 지역으로 용의 허리를 타고 승천할 만한 큰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한다. 그는 최근 100년동안 시안시가 배출한 최고의 정치가이기도 하다.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74년 9월 칭하이성 구이더(貴德)현 허둥(河東)향 궁바(貢巴)대대(大隊)에서 지식청년으로 일하기 시작한 자오러지는 1975년 7월 칭하이성 상업청 통신원을 거쳐 1977년 2월 마지막 공농병학생의 자격으로 베이징대학 철학과에 입학했다. 때문에 그는 베이다(北大)방으로 불리기도 한다.

◆베이다황, 베이다창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중국 관료사회에는 ‘대청제국 베이다황(大淸帝國 北大荒)’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중앙의 고위층은 거의 칭화대학교를 졸업했고, 베이징대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매우 드물다는 뜻이다. 하지만 제17대 전국대표대회에서 베이징대학교 출신인 리커창 등이 중앙에 진출하면서 ‘베이다황(北大荒)’은 ‘베이다창(北大倉, 베이징대 출신이 주도한다는 뜻)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현재 9명의 상무위원 중 후진타오, 우방궈(吳邦國), 시진핑(習近平) 등 3명이 칭화대학교 출신이다. 16대 상무위원회에는 4명의 칭화대학교 출신이 있었다. 현재 상무위원으로는 리커창이, 정치국위원으로는 보시라이(薄熙來)와 리위안차오(李源朝)가 베이징대학교 동문이다. 중앙위원 중에는 자오러지 서기를 비롯해 산시(山西)성 서기 위안춘칭(袁純淸), 국무원 문화부장인 차이우(蔡武), 네이멍구(內蒙古) 서기인 후춘화(胡春華) 등이 있다.

◆환경친화, 자연조화 산업 추구

베이징대를 졸업해 1980년 칭하이성 상업청 정치처 선전간부로 복귀한 2007년까지 칭하이성을 떠나지 않고 그 곳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1984년 12월 칭하이성 우진쟈오뎬(五金交電) 화공공사 당위 서기, 86년 4월 성 상업청 부청장, 91년 2월 상업청 청장 등 대부분 칭하이성에서 경력을 쌓았다. 1993년 2월 성장 조리(助理)로 승진한 그는 94년 7월 부성장, 99년 8월 대리성장을 거쳐 2000년 1월 마침내 칭하이성의 최고 행정직인 성장을 거머쥐었다.

칭하이성의 대리성장과 성장, 당서기를 거치는 8년간 그는 칭하이성의 발전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성장, 서기로 재직하던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칭하이성의 지역총생산(GRDP)은 263억위안에서 641억위안으로 2.4배 늘었다.

그는 급속한 성장보다 지속적인 발전을 더 원했다. 그는 지방관원들에게 “동부가 걸었던 길을 그대로 반복하지 말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가 원한 것은 초고속 성장보다 환경과 성장의 조화였다. 소득증대에 도움이 되더라도 공해산업은 최대한 억제했다. 대신 칭하이성의 천연지형을 이용한 수력발전과 소금, 관광업에 치중했다. 



◆납중독사건 일벌백계

2007년 3월 산시성 서기로 옮겨온 후 임기초반에 그는 두번의 큰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2007년10월에는 가짜 호랑이 사진 사건이 불거진다. 일회성 사건이었지만 중국 인민들에게 가져온 충격은 컸다. 당시 산시 주민 저우정룽(周正龍)은 저우완(神州灣)산 절벽에서 멸종한 것으로 알려진 야생 화난(華南)호랑이의 사진 촬영에 성공했다며 71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이를 두고 산시성 임업청은 “감정결과 진짜 사진이 맞다”고 확인했고 이 소식에 전 중국이 열광했다.

하지남 한 네티즌이 “사진속 호랑이가 우리집 달력의 호랑이와 똑같다”며 의혹을 제기했고 장장 8개월동안 사진의 진위논란 끝에 결국 합성사진으로 밝혀졌다. 자오서기는 “과학적 발전관에 비춰봤을 때 이는 어처구니 없는 사건이며 우리에게 경종을 울려줬다”며 입업청 관계자 13명을 전격 면직조치하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2009년8월에는 산시성 바오지(寶鷄)시에서 731명의 어린이들이 납에 중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다이정서(戴征社) 바오지 시장은 납중독 주민들에게 사과를 하면서 사고공장인 둥링(東嶺)제련소에서 반경 1㎞내 주민들을 1.3㎞밖의 천춘(陳村)진으로 이주시켰다. 자오러지는 격분했으며 둥링제련소를 폐쇄시켰고 11명의 담당 관리를 면직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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