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만에 개인전을 선보이는 이진주 작가.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젊은 작가들을 위한 전시공간' 16번지(대표 도형태)는 11일부터 3년만에 선보이는 이진주(31)의 개인전 '사라지는, 사라지지 않는 Evanescing, In-evanescing'전을 개최한다.
맑고 투명하면서 세밀하게 화폭에 담아낸 작품은 사연이 많아 보인다. 가슴을 드러낸 여인들, 팬티와 팬티스타킹만을 걸치고 울고 있는 여인들과 이파리없는 나무, 의자, 쇼파등이 길을 잃은 듯 불완전하게 떠돌고 있다. 극사실화지만 신산스럽고 초현실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다양한 시공간의 기억과 감정이 자유자재로 혼재된 장면들은 마치 누군가의 꿈에 들어온 것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검은 눈물.2011 |
도대체 무슨일이 있었던 것일까.
10일 서울 사간동 16번지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만삭의 몸이었다. 두달후면 태어날 둘째아이라고 했다.
말간 얼굴을 한 D라인의 작가는 화면속 여인들과 닮아보였다.
작가는 "나의 작업은 훼손된 정서의 기억과 일상들에 대한 은밀한 상상으로 부터 출발한다"고 했다.
그림속에 풀어낸 기억의 실타래는 무한정 이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은 "왜 하필 부정적인 사건은 강렬하게 기억에 새겨지는가, 왜 그토록 기억은 불안정하며 탈맥락화 되어 있는가"라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한 탐구 과정"이라고 말했다.
"우울한 탐험가와 같이 거부된 감각의 귀환된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작가는 "기억은 현재와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작가는 기억에게 영혼을 잠식당한 듯 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팬티 스타킹'오랜만에 보니 반갑다. 인물들이 독특하다. 몸과 얼굴은 정확하게 보여주는데 머리는 없다.
-초기에 작업할 때는 인물들에 머리카락이 조금 있었는데 이후 완전히 없애버렸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를 하고 있느냐에 따라 인물의 느낌이 전혀 다르고, 연출되는 상황에 따라서도 인물의 진의, 성격, 상황이 너무나 어떤 한 현실에 갇혀 버리는 느낌이 크더라.
스타킹은 나의 심리적 대리인으로 등장하는 인물을 단단하게 보호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차용됐다. 스타킹을 신어봤으면 알지 않나. 아주 단단하지 않으면서 묘한 느낌, 살결을 감싸는 부드러움을 갖고 있으면서 다리 전체를 단단히 조이기도 하고…. 마치 강한 어떤 것이 몸을 긴장감 있게 한데 묶어주는 느낌이면서, 또 동시에 굉장히 따뜻하기도 하지 않는가.
불완전한 기억의 섬, 2011, Korean color on Fabric, 107x270cm |
▲작품들이 신산하다. '불완전한 기억의 섬' '어제의 거짓말'등 작품 제목도 '기억'이 화두다. 작업의 근간은 어떤 기억에서 출발 한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 혹은 사고들에 대한 강박이 있다. 스무 살 무렵 학교 앞에서 살며 별별 사건 사고를 겪었던 기억이 있다.
홍대 앞 괴담사건이 있을 때, 대학 친구가 퍽치기에 맞아서 죽기도 했고, 친한 언니가 샤워하고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연다던가, 자취하던 친구가 밤 10시 반쯤 아르바이트 마치고 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 머리채를 잡고 폭행을 시도하여 도망가고자 소리를 지르니까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그 남자를 잡았던 기억도 있다.
그냥 어느 날 삶에 그런 사고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면서, 생각하기도 싫고 적극적으로 해결하고 싶지도 않고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알려 걱정 끼치고 위로 받고 싶지도 않고 그냥 이렇게 잘 조심하고 살아야지 하고 살았는데, 그런 감정과 기억들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것들이 아무한테도 한번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최초의 기억과 맞물리기 시작했다. 4살 때 김해 낙동강 근처에 살고 있었는데 친구들과 개구리를 잡으러 갔다가, 재미가 없어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길을 잃고 납치를 당한 적이 있다.
너무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여서였던지 무섭지도 않고 뭐가 뭔지도 몰랐었다. 어느 순간 집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막 도망쳤고 동네에 내려와 골목에서 신나게 놀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어느 순간부터 이때의 경험이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들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던 꼬마였고 그냥 평범하게 자랐는데, 스무 살 무렵에 그런 사건 사고들을 경험하면서 그때의 기억까지 뭉쳐지게 된듯하다.
왜 사라지지 않을까? 그 기억은 진짜일까? 그것을 떠올리고 환기할 때마다 왜곡될 수 있는 것, 변형될 수 있는 것, 진실이냐 환상이냐의 문제를 넘어선 지금 현재 우리가 떠올리는 것, 지금 현재 진실로 보이는 것, 그런 것들에 관심이 많아졌다.
공기로 만든,2011 |
▲작품에 전반적으로 등장하는 ‘물’은 어떤 의미인가.
-물은 뒤얽힌 감정들의 혼합체이다. 내가 집중하고 있는 감정이나 훼손된 기억들이 물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물은 평탄하게 순환하고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의미이지 않은가. 하지만 물이 고여 있을 때를 생각하면 또 조금 달라진다. 썩은 물의 느낌, 우리가 먹는 많은 음식들은 물기가 있는데, 방금 전에 만든 멸치국수도 조금만 지나면 쉬어버린다. 음습한 마음에 있는 기억이나 고여있는 생각들이, 기억들과 연결된다. 고여서 썩어빠진 감정에서 흘러나온 눈물 같은 것과 이어지기도 하고, 그런 의미에서 호스로 물을 주고, 먹이고, 어딘가 부어버리고, 반대로 드라이기로 물기를 말리고, 태우고, 지키고 하는 모습들을 표현하는거다.
▲화면속 사물들은 일상에 있는 것들이다. 익숙한 것들인데 작품속에선 낯설다.
-예전에 행주라는 곳에 살았다. 자유로와 경의선, 행주대교에서 이어진 고가도로로 잘려, 마치 섬처럼 남겨진 시골이다. 그러한 주변부 지역이 대체로 그렇듯 목가적인 전원풍경이 아닌 덜 개발되어 정리되지 않은 주택과 경작지가 이어져있고 생뚱맞은 가건물도 섞여있는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여기서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으로 남겨진 그 공간과 다시 맞물리게 된 것 같다. 결혼해서 아기를 갖고 낳아 키우면서 벌어지는, 여자로서 겪은 개인적인 상황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사라지지 않은 상처와 감정들은 그렇게 현재의 공간과 사물들 속에서 기억들이 다시 뒤엉켜서 전혀 다른 세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순환,2011 |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너무 너무 공감했다.
우리가 다 알고 경험하는 것이지만 인식의 체계에서 미처 눈치 채지 못했던, 낯설고 오묘한 지점을 깨닫게 해주는 예술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전혀 엉뚱하고 새로운 것 보다,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새롭게 깨닫게 해주는 그런 것들에 나는 감동한다.
끊임없이 관찰하고 사유하고 탐구하여 저에게 직관적으로 인상으로 남는 것, 시각적 이미지로 남는 것을 손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기억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감각인 후각이나 미각에 대한 공감각적인 작업으로 고민도 한다.
내 삶에서 지워지지 않는 오류로 가득한 질문으로 시작된 작업이지만 그것에 대한 명료한 답을 찾기보다는 수많은 질문들로 뻗어나가 더 깊이 있는 질문들로 나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 전시는 9월 11일까지. (02) 2287-3516
◆이진주= △2003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졸업 △2005년 홍익대학교 동양화과 석사과정 수료 △개인전 4회 △ 2009 중앙미술대전 우수상△송은미술대전 장려상 △200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젊은 예술가 성장 프로그램 선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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