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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현지시각) 미국 워싱턴의 워싱턴 기념탑을 배경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기념상이 보인다. 28일로 예정됐던 킹 목사 기념상 헌정식은 워싱턴 도심에 허리케인 '아이린' 경보때문에 연기됐다./연합 |
(워싱턴=송지영 특파원) 마틴 루터 킹(MLK) 주니어의 기념관이 워싱턴DC 한복판에 개장돼 지난 주말 공식 기념행사가 있었다. 이 기념관은 토머스 제퍼슨과 에이브러험 링컨 기념관 사이에 자리잡아 이제 MLK는 이들 대통령과 역사적으로 동급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권 운동가로서 큰 일을 했지만 MLK가 제퍼슨, 링컨과 동급이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물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미국에서 일고 있는 그에 대한 추모 열기와 재평가 작업은 '동급'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MLK는 미국이 안고 있던 문제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비전을 제시했다. 링컨에 의해 흑인 노예가 해방된 지 100년이 지난 1960년대에 여전히 미국은 흑·백 인종차별로 심한 내부 갈등을 갖고 있었다. 이같은 갈등은 아시안 같은 유색 인종에게도 적용돼 1950~60년대까지도 백인 여성은 유색 인종과 결혼할 수 없는 법안이 시행되고 있었다. '인권의 나라' 미국에서 불과 50년 전에 있던 일들이다.
마틴 루터 킹은 1963년 지금 그의 동상이 세워진 자리에서 그 유명한 "난 꿈이 있다(I have a Dream)"는 명연설을 통해 "언젠가 우리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닌 능력과 개성 등으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기다린다"고 피력했다. 당시 현장에 모인 25만명의 시위 참가자들은 열광했고 매스컴을 통해 킹 목사의 연설은 전 세계적인 기념비가 되었다.
킹 목사의 연설이 있은 지 1년 만인 1964년에 인권법, 1965년엔 선거법이 연방 의회에서 통과돼 비로소 미국은 다수와 소수, 백인과 유색 인종, 남성과 여성이 차별받지 않는 현재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과 수십년 전의 일이다. 그 과정의 한 가운데 바로 MLK가 있었던 것이다.
1968년 시해되기 직전까지 킹 목사는 소수계의 인권과 경제적 평등을 부르짖었다. 소수계가 제대로 일하고 대접받기 위해서는 교육과 일자리, 주택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소수계 지원 법안' 제안으로 이어졌고, 지금 돈으로 약 6000억 달러가 넘는 방안을 제시했다. 소수의 반발이 두려웠을까? 그는 결국 시해되었지만 그의 정신과 실천은 지금까지 미국과 전 세계 역사에 이어져 오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제3세계 혁명가들의 말이 미국에서도 나타났다.
만일 그가 아니었더라면 민주주의의 선봉으로 위장된 미국의 겉 모습과 소수계를 차별하는 내부 모순과의 충돌로 결코 지금 같은 굳건한 인권 국가로서의 미국이 자리잡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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