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혁명으로 사라진 삼국지 유적 |
류진주 장환후묘 관장이 본지취재진에게 현재 장비 유적지 보존현황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
(아주경제 배인선·김현철 기자) “도대체 진정한 옛 유물 유적이 없다. 온통 새로 만들고 지은 것뿐이다.”
장환후묘의 실제 소유자인 류진주(柳金柱) 관장은 “국가에서 지원도 잘 안해준다”면서 이같이 토로했다.
실제로 우리는 장환후묘를 둘러보던 중 긁히고 파이고 두 동강이 났거나 훼손 정도가 심해 아예 새로 만든 비석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전통을 소멸하자’라는 구호 아래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물을 모두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곳 바오딩(保定)은 봉건적이고 전근대적 구습에 젖은 도시라는 이유로 홍위병들의 유적 파괴 행위가 어느 곳 보다 기승을 부렸다.
류 관장은 “본래 이곳 장비의 사당에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비석이 23개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다 소실되고 지금은 겨우 11개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이곳에 있던 비석들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고작 5위안에 거래돼 팔렸다”며 “이후에 노력 끝에 일부는 되찾아 왔으나 아직도 못 찾아 온 것이 절반 이상이다”고 말했다.
어떤 비석은 일반인이 보관하고 있어 거금을 주고 사오기도 하지만 일부 비석 유물들은 다리 건축 자재로 사용돼 다리를 허물지 않고는 되찾아 올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
현재 남아있는 비석은 장비의 우물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청나라 강희제 때 세운 ‘한장환후고정비’(홍수로 소실돼 1984년 재건), 장비의 생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한장환후고리비(汉张桓侯故里碑)’, 명나라 때 장비의 사당에 세웠다는 ‘한환후장익덕묘비(汉桓侯张翼德庙碑)’, 그리고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한소열제결맹고리비’등 11개뿐이다.
류 관장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비석을 되찾아온 사례를 소개하는데 듣다 보니 참으로 스토리와 사연들이 다양했다.
한장환후고리비의 경우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비석을 쓰러뜨려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닌 탓에 절반으로 두 동강이가 난 것을 훗날 되찾아 다시 붙여놓았다.
장환후묘의 실제 소유자인 류진주(柳金柱) 관장은 “국가에서 지원도 잘 안해준다”면서 이같이 토로했다.
실제로 우리는 장환후묘를 둘러보던 중 긁히고 파이고 두 동강이 났거나 훼손 정도가 심해 아예 새로 만든 비석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전통을 소멸하자’라는 구호 아래 예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문물을 모두 파괴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곳 바오딩(保定)은 봉건적이고 전근대적 구습에 젖은 도시라는 이유로 홍위병들의 유적 파괴 행위가 어느 곳 보다 기승을 부렸다.
류 관장은 “본래 이곳 장비의 사당에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비석이 23개 있었으나 문화대혁명 때 다 소실되고 지금은 겨우 11개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는 “문화대혁명 당시 이곳에 있던 비석들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 고작 5위안에 거래돼 팔렸다”며 “이후에 노력 끝에 일부는 되찾아 왔으나 아직도 못 찾아 온 것이 절반 이상이다”고 말했다.
어떤 비석은 일반인이 보관하고 있어 거금을 주고 사오기도 하지만 일부 비석 유물들은 다리 건축 자재로 사용돼 다리를 허물지 않고는 되찾아 올 방도가 없는 상황이라는 것.
현재 남아있는 비석은 장비의 우물을 세운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청나라 강희제 때 세운 ‘한장환후고정비’(홍수로 소실돼 1984년 재건), 장비의 생가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는 ‘한장환후고리비(汉张桓侯故里碑)’, 명나라 때 장비의 사당에 세웠다는 ‘한환후장익덕묘비(汉桓侯张翼德庙碑)’, 그리고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는‘한소열제결맹고리비’등 11개뿐이다.
류 관장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비석을 되찾아온 사례를 소개하는데 듣다 보니 참으로 스토리와 사연들이 다양했다.
한장환후고리비의 경우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들이 비석을 쓰러뜨려 바닥에 질질 끌고 다닌 탓에 절반으로 두 동강이가 난 것을 훗날 되찾아 다시 붙여놓았다.
문화대혁명 당시 홍위병에 의해 훼손돼 두 동강이 난 한장환후고리비 |
한환후장익덕묘비는 땅 밑 5m 아래 파묻혀 있던 것을 리우총 관장이 직접 사나흘 간 땅을 파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류 관장은 “당시 사흘 간 맨 땅을 파내려 갔으나 아무 것도 찾을 수 없어 포기하려는 찰나, 한 늙은 노인이 ‘그 방향으로 계속 파내려 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며 “유비 관우 장비를 향해 향을 피우고 절을 한 뒤에 마음을 다잡고 다시 찾으니 하루 만에 땅 구덩이 속에서 이 비석을 찾을 수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며 감개무량해 했다.
문화대혁명 때 소실된 것을 류 관장이 사흘밤낮으로 땅을 파헤쳐 찾아낸 한환후장익덕묘비. |
비석을 직접 찾아낸 그에게 전래동화에서 나올법한 이야기를 듣자 처음엔 그냥 돌로 보였던 비석이 취재진에게 신기한 기운을 가진 요물단지로 다가왔다.
이 비석은 이미 온갖 풍파를 다 겪은 탓에 긁히고 파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다.
‘한소열제결맹고리비’의 경우는 문화대혁명 때 다 훼손되고 비석 윗부분만 약 10cm 정도 남아 후에 유명한 석공에 부탁해 나머지 부분을 새롭게 복원한 것이라고 리 관장은 설명했다.
이런 탓에 비석의 상부는 오래된 흔적이 남아있으나 중하부는 이제 갓 만든 비석처럼 하얗고 깨끗해 대조를 이뤘다.
문화대혁명 때 훼손된 한소열제결맹고리비. 상부는 옛것 그대로이나 중하부는 새로 복원한 것이다. |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처럼 옛 것을 배워 익혀 새것을 알아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문혁은 비록 10년 정도 밖에 지속되지 않았지만 이 기간동안 수백 수천년이 된 숱한 옛 것들이 깡그리 부숴져 나갔다. 삼국지의 소중한 '문화적 유산'들이 문화대혁명 때 파손되거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얘기를 들으니 반문명적인 문혁의 광기앞에 새삼스레 소름이 돋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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