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가 급락한 것이 비단 우리나라의 원화뿐인 것은 아니다. 신흥국 통화가 모두 하락했다. 지난달 미국의 신용등급 강등, 경기침체 우려가 불거졌을 때만 해도 신흥국 통화는 잘 버텼다.
그러나 이달 들어 상황이 달라졌다. 그리스 재정위기가 이탈리아, 스페인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신흥국 통화의 신뢰도가 급격히 내려갔다. 이달 들어 브라질 헤알화, 남아공 랜드화, 폴란드 즐로티화 가치는 미 달러화 대비 9% 이상 급락했다. 외화부채가 많은 헝가리의 포린트화 가치는 10% 이상 떨어졌다. 위안화를 제외한 모든 신흥국 통화가치가 하락한 것이다.
유로존 재정위기의 영향을 덜 받을 것 같은 브라질 헤알화 가치가 일년래 최저치로 급락한 것은 아이러니다. 브라질은 인플레이션율이 7%이지만, 기준금리가 12%에 달해 실질금리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그렇지만 이것이 외국인의 브라질에 대한 투자유인이 되지 못하면서 헤알화는 다른 신흥국 통화와 동반 추락했다.
문제는 이 와중에 국내 기업들 중 외화(또는 외화표시) 대출에 관심을 갖는 기업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출은 외화를 기준으로 대출·차입이 이뤄지는 거래로서, 기업 입장에서는 차입시 환율이 높고, 상환시 환율이 내려가면 이익을 볼 수 있는 구조다.
지난해 7월 외화대출 용도제한이 강화돼 모든 기업체의 국내 시설자금 대출에 대해서 허용되던 외화대출이 중소제조업체로 국한됐다. 그것도 국내시설자금에 대해서, 작년 6월까지의 대출잔액 범위내로 한정됐다.
많은 업체가 이 조치에 따라 외화대출을 받지 못하게 됐다. 그러나 아직 여건이 되는 기업들은 지금이 혹시 기회가 아닐까 생각하는 모양이다. 달러화, 특히 엔화 대출에 눈독을 들이고 분위기다. 더 이상 원·엔 환율이 올라가지 않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 환(換)에서도 벌고, 금리에서도 이득을 볼 것이라는 욕심이 마치 이성적인 결정인 것처럼 판단하는 듯하다.
이는 정말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는 환율이 우리 예상대로 움직이는 매우 단순한 거시 변수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 산다. 주식과는 달리 종목이 단 한가지 밖에 없는 시장이라 예측이 쉽다고 판단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천부당만부당한 얘기다. 만약 환율 전망이 생각만큼 쉽다면 왜 키코(KIKO)로 그렇게 많은 알짜배기 기업들이 쓰러졌겠는가. 부채(負債) 하나 없이 훌륭하게 일군 기업이 잘못 판단한 환(換)헤지(hedge) 계약 하나로 허망하게 무너지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환율의 변동성이 커진 상태다.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글로벌 유동성은 급격하게 팽창했고, 유럽의 재정위기는 확산일로다. 유로존의 몇 개 나라가 쓰러질 수도 있다. 북한 리스크도 잠복해 있다. 멀리는 백두산의 화산폭발까지 우려되고 있는 시점이다.
환율이 어느 방향으로 튈지 정말 예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요인들이 아니더라도 환율변동은 신(神)만이 안다고 하지 않는가.
특히 엔화자산은 전통적으로 안전자산으로 인정받는다. 세계경제가 지금처럼 체력이 저하된 상황에서는 언제든 엔화 가치가 급등할 수 있다. 지금 달러당 엔화가 76엔대에서 버티는 것은 일본 당국의 시장개입 때문이다.
주변 여건이 악화하면 시장개입이 어려워질 수 있다. 한 금융기관 경제연구소는 올 연말 100엔당 원화가 1,700원대까지 올라갈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있다. 한일 양국 경제의 펀더멘털로만 본다면 단기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전망치지만, 경제 펀더멘탈이 환율을 결정짓는 모든 것은 결코 아니다.
파이낸셜타임지는 유로존 재정위기로 한국경제의 위험이 특히 증가했다고 지난 21일 보도했다. 단기외채의 규모가 너무 크다는 것을 지적했다. 실지로 요 며칠 사이에 한국국채의 CDS(Credit Default Swap, 신용부도스왑) 프리미엄이 위기의 한 가운데 있는 프랑스의 그것보다 더 높아졌다. 환율 변동성이 어디까지 커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환율 예측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분야다. 기업은 기업본연의 자세에 충실해야 한다. 환에서 조금의 이익을 남기려다 크게 잃을 수 있다. 소탐대실(小貪大失)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 엔화 환율이 높아 보이지만, 더 높이 오르지 말라는 법은 세상 어떤 책에도 나와 있지 않다.
산은경제연구소 박용하 경제조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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