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3월29일 장웨이가 취임후 현지시찰을 시작했을 때도 그는 최대한 겸손하고 진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는 당일 칭하이성의 성회인 시닝(西寧)시 청베이(城北)구의 신주거단지를 둘러봤다. 그는 직접 주택 안에 들어가서 생활상을 목도했다. 이어 칭하이의 신농촌건설과 칭하이 각민족 농민들의 생활수준을 꼼꼼히 체크했다. 그의 실지조사를 동행했던 현지매체의 한 기자는 “창웨이는 질문을 많이 했을 뿐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거나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며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는 성의있는 태도에 현지 관리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안정적인 사회를 바탕으로 온 힘을 다해 사회를 건설하고, 민생문제 해결에 힘을 쓰고, 민족종교업무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며 “이를 통해 한층 더 칭하이성 발전에 화해, 안정, 질서있는 사회환경을 세워야한다”고 지역발전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그는 정법분야 전문관료에서 지방지도자로 빠르게 변모해갔다.
창웨이의 부임이후 칭하이성의 경제는 빠른 속도로 발전을 거듭했다. 2007년 760억위안이었던 칭하이성의 GDP는 2008년 961억위안, 2009년 1081억위안을 찍고 2010년 1350억위안으로 늘어났다. 이대로라면 2011년의 GDP는 2007년 대비 4년만에 두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2010년 도시1인당 가처분소득은 1만3855위안으로, 농민 1인당 순수입은 3863위안으로 증가하는 성과를 내기도 했다.
1953년 3월 장쑤(江蘇)성 우시(無錫)에서 태어난 창웨이는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1969년 16세의 나이에 군에 입대해 푸젠(福建)성 해군기지 후근부대에서 근무했다. 1975년 제대한 창웨이는 베이징의 화공공장 부지도원으로 배치받는다. 이후 1979년 베이징시 화공국 직공대학 시약전문학교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한다. 이후 시약연구소 부소장을 거쳐 베이징화공공장 서기까지 올라간다.
이후 1987년 그는 34세의 나이에 공청단 베이징시 위원회 서기를 맡게 된다. 공청단 베이징 서기로 1989년 톈안먼사태를 맞았으며, 그는 중앙의 방침을 충실히 고수했다. 3년을 공청단에서 근무한 이후 창웨이는 1990년 베이징시 스징산(石景山)구 서기로 발탁된다. 당시는 공산당 중앙조직부가 간부연경화정책(젊은 간부를 적극적으로 발탁하자는 방침)을 펴던 때였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구 서기에 오른 그는 베이징 정계에 떠오르는 샛별로 주목받았었다. 4년후 창웨이는 베이징시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창웨이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1996년을 맞게 된다. 그해 창웨이는 베이징시 정법위 서기에 임명된다. 이때부터 그는 11년동안 공안 인생을 살게 된다. 베이징 정법위 서기는 베이징 공안국을 관장한다. 그는 정법위 서기, 베이징시 공안국장, 베이징시 기율위원회 서기 등을 겸임하며 그야말로 베이징시의 공안 부분을 손에 틀어쥐었다. 베이징시 공안국의 한 인사는 “창웨이는 정법분야에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으며, 그의 특기는 복잡하게 얽혀있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것이었다”고 소개했다.
정법분야 전문가인 만큼 그는 2009년 칭하이성 서기에서 국무원 정법부장으로 이동해 갈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해 여름 신장(新疆)구르자치구 우루무치에서 유혈시위가 발생했고 당시 14년간 신장자치구 당서기를 맡아온 왕러취안(王樂泉)을 교체하라는 여론이 일었었다. 공산당 중앙은 멍젠주(孟建柱) 공안부장을 신장자치구의 새 당서기로 기용하고 창웨이를 공안부장에 앉히는 안을 유력하게 검토했었다고 한다. 이 안은 결국 불발로 끝났지만 창웨이가 유력한 공안부장 후보군 중 한명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이는 창웨이가 정법분야 전문가로 공산당 중앙의 신임을 받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는 유력한 차기 공안부장으로 꼽힌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