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에는 중국 증권감독위원장으로 갈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당시 중국 주식시장은 부진을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활력소가 필요했다. 황치판의 증감위원장 선임이 금융시장에 새 바람을 불러올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던 것. 황치판은 상하이 푸동을 금융센터와 하이테크 산업단지로 육성해 상하이가 중국 금융일번지로 자리매김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그로 인해 시장의 평판이 좋았다.
당시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은 “증감위원장인 상푸린(尙福林) 위원장이 크게 잘못한 것은 없지만, 시장은 활력을 몰고 올 치어리더를 원하고 있다”고 보도해 황치판에 대한 금융시장의 신뢰를 반영했다.
이후 2007년 부임한 보시라이(薄熙來) 충칭시 서기는 황 시장이 쌓아둔 경제적 기초를 바탕으로 민생발전을 강조하는 과감한 프로그램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황치판은 국유기업을 발전시켜 민영기업의 성공을 유도하는 선순환을 조성했다. 충칭시 정부가 국유기업의 수익을 활용함으로써 재정 여유가 생겨 민영기업의 세금을 중국 평균 25%~33%선보다 낮은 15%로 유지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더많은 기업과 일자리를 유치할 수 있었던 것.
올해 충칭시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부동산 보유세를 신설해 주목을 받았다. 이 역시 황치판 시장의 작품인 것으로 전해진다. 2011년 1월 황치판 충칭시 시장은 “올해 1350만㎡ 규모의 공공주택을 공급하는 것 외에 고급 주택에 대한 부동산세 징수로 시장의 균형을 맞출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9월 황치판 시장은 “주택 재산세가 머지않아 중국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1~2년 뒤에는 주택 재산세가 중국 전역으로 확대돼 집값 상승을 억제하는 장기적인 제어 수단이 될 것”이라며 “충칭시가 개인 주택에 대한 재산세 개혁을 시범적으로 시행, 문제점을 보완한 뒤 1-2년 뒤에는 중국 전역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내륙개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2009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황치판은 “지난 30년간이 연해지역 개방의 시대였다면 앞으로 30년간은 내륙지역 개방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는 “상하이는 충칭에 비해 일찍 개방된 도시며 충칭은 상하이에 비해 10년 정도 낙후된 도시”라면서 “그러나 중국의 개방 과정은 연해에서 내륙지역으로 진전하고 있으며 내륙이 연해지역보다 유리하다”고 말했다.
충칭은 고속도로 건설의 원가가 높아 고속도로 통행료가 비싸며 내륙지역이어서 운송비용이 많이 드는 지리적 약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황 시장은 이에 대해 “충칭시가 연해지역과 경쟁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며 “노동력 원가가 싸고 세제혜택이 뛰어나기 때문에 생산품을 항공으로 운송할 수 있는 전자상품 제조업이나 소프트웨어 하청사업의 경우 발전의 기회가 높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서부의 급성장하고 있는 내륙시장을 끼고 있는 충칭을 주목해야 한다”고 자신했다.
1952년 5월 저장(浙江)성 주지(諸暨)에서 태어난 황치판은 1968년 문화대혁명 당시 상하이코크스공장 현장근로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74년 상하이기계학원 측정기기학과에서 자동화기기 전공했으며 졸업후 상하이코크스공장 엔지니어로 돌아갔고, 이후 1983년 부공장장까지 올라간다. 1983년 상하이시 정당(整党)판공실(辦公室) 연락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1984년부터는 상하이시 경제위원회 종합계획실 부주임으로 활동한다. 1990년 상하이시 푸둥개발 판공실 부주임으로 자리를 옮겼고 1993년에는 상하이시푸둥신구관리위원회 부주임이 됐다. 1994년에는 상하이시 부비서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2001년에 충칭시 부시장으로 이동했고 2010년 충칭시 시장에 올랐다. 현재 충칭행정학원 원장과 시국유자산감독관리위원회 서기를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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