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기행6-허베이편> 6-2.건안문학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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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2-06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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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문학의 발자취


중국 허베이 한단시 박물관 로비에 걸려있는 동벽화. 가운데 조조를 중심으로 건안칠자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아주경제 배인선 김현철 기자)‘오로지 재주가 있는 이를 천거하면, 나는 그를 등용해 쓰겠다.(唯才是擧 吾得而用之)’

조조는 이와 같이 인재를 중시하는 정책을 적극 펼침으로써 전국에서 유능한 문인과 학자들을 동작대(銅雀臺)로 불러들여 그 재능을 펼치도록 했다.

덕분에 당시 연이은 전쟁으로 어지럽던 시절에도 ‘건안문학(建安文學)’이라는 새로운 문학 장르가 꽃 피울 수 있었다.

‘건안’은 한 헌제의 연호다. 한 말기 정치 권력의 중심이던 조조, 조비, 조식 등 조씨 삼부자와 함께 활동한 일곱 명의 대표 문인인 공융, 왕찬, 진림, 유정, 서간, 완우, 응창은 바로 당시 이름 날리던 건안칠자(建安七子)다.

실제로 우리는 업성 유적지에서 건안칠자와 함께 유명 여류시인 채문희까지 총 8명의 문인을 모셔놓은 한 허름한 전각을 방문하기도 했다.

중국 업성유적지에 모셔놓은 건안칠자와 여류시인 채문희. 이들과 더불어 조조, 조비, 조식 삼부자는 당시 건안문학을 이끈 대표적인 문인들이다.


공자의 후예로 조조의 눈 밖에 나 결국 죽임을 당한 공융, 그리고 조조가 지병인 두통을 잊을 정도로 훌륭한 문장을 썼다고 전해지는 진림, 그리고 조조가 사랑한 여류 시인 채문희 등의 조각상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그들의 표정에서는 난세 속에서도 이상을 향한 포부를 잃지 않으려는 포부와 함께 비장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건안 문학은 문장이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며, 전란의 비참함을 노래하거나 사람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당시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백성들의 피폐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꿈을 꾸던 영웅들의 기상과 정신이 담겨있는 것.

이리하여 건안문학은 비방하고 강개하면서도 애절하다 하여 ‘건안풍골(風骨)’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그리고 조조는 바로 이 건안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對酒當歌, 人生幾何? 술마시며 노래를 불러라.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되더냐?
譬如朝露, 去日苦多. 인생은 아침이슬 같으리니, 흘러가 버린 지난날의 고통들.
慨當以慷, 憂思難忘. 슬퍼하며 탄식해도, 시름을 잊기는 어렵구나.
何以解憂, 唯有杜康. 어이하면 이런 시름을 풀 수 있으리요. 그건 오직 술뿐일세.

-조조 <단가행(短歌行)> 中

단가행에는 술에 취해 모든 시름을 잊고 싶다는 조조 마음 속 고뇌가 담겨있다. 냉철하면서도 차가운 모습 아래 감춰진 상처와 아픔을 예술을 통해 승화시킨 조조의 부드럽고 여린 감성이 묻어나는 듯 하다.

이 밖에도 조조가 쓴 시는 20여 수가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대부분은 고통스러운 시대상을 표현하고 있어 ‘시로 쓴 눈물의 역사’라 불리기도 한다.

세간에서는 조조를 ‘난세의 간웅’이라 폄하해 왔다. 유학자들 사이에서도 조조의 문학은 천박하다며 외면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조조의 평이하면서도 자유롭고 거리낌 없으며 소박하고 정제된 문체는 당대 으뜸이었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당대 ‘시선(詩仙)’이라 불리던 이백(李白)은 건안문학이 당시 문학의 최고 경지를 개척했다고 예찬했다. 중국 문학의 아버지 루쉰(魯迅) 역시 ‘조조를 문장 개혁의 시조’라고 격찬하기도 했으니 그 예술적 경지를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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