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중국 당국은 관영 매체들의 보도를 통해 한.미 서해 군사훈련 계획에 대한 불만을 간접적으로 시사했지만 반대한다는 공식 입장 표명은 마샤오톈의 발언이 처음이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에는 4명의 부총참모장이 있으며 이 중 마샤오톈은 인민해방군의 군사외교와 대외정책을 총괄한다. 또한 마샤오톈은 중국의 대외정책을 결정하는 핵심기관인 외사영도소조 16인의 멤버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가 인민해방군을 대표해 미국의 게이츠 국방장관과 벌인 설전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2008년6월1일 마샤오톈은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7차 아시아태평양안보대회에 참석해 당시 이슈가 됐던 대륙간 탄도탄에 대해 “중국은 자국방어에 힘을 쏟고 있을 뿐이며 대륙간 탄도탄은 단지 중국보호를 위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회의에 함께 참석했던 게이츠 국방장관은 “중국의 대륙간 탄도탄이 공격용이 아니면 무엇에 쓴다는 말이냐”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마샤오톈은 “중국은 (미국의) 미사일방어(MD)체제 확산이야말로 태평양지역의 안정을 해칠 수 있음을 경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가이트너는 이에 대해 “이는 군사문제가 아닌 정치적인 관점상의 문제”라며 “미국은 중국의 군사력 강화를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필요하다면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마샤오톈은 “중국의 국방비는 선진국들에 비해 몹시 적은 수준이며 어떤 국가에게도 군사적인 위협이 될 수 없다”라고 미국을 겨냥했다. 당시의 치열한 설전은 양국간의 긴장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는 1949년8월 허난(河南)성 공이(鞏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마짜이야오(馬載堯)는 항일시대 초기에 혁명에 참가했으며 1949년부터 49군청년간부학교 부교육장을 맡은 후 30여년동안 부대간부 정치교육생애를 걸었다. 1965년 공군제2항공예비학교 학생으로 입학한 마샤오톈은 제12항공학교를 거쳐 항공교관을 지냈다. 1972년부터 전투기 조종사로 근무하기 시작한다. 1974년 그의 인생에 큰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의 대형 다큐멘터리인 궈칭숭(國慶頌)에 출연한 것.
당시 중국은 신중국 성립 25주년을 맞아 마오쩌둥이 신중국 성립을 선포한 1949년에 태어난 젊은 인재들을 몇 명 선정해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과학자, 기술자, 예술인, 교육인 등이 선정됐으며 군인으로서는 유일하게 마샤오톈이 뽑혔다. 전투기조종사라는 매력도 있었겠지만 마샤오톈은 외모가 수려했다. 또한 그는 인민해방군 공군에서 가장 젊은 나이에 항공 부중대장에 올랐던 점도 고려됐다. 다큐멘터리 궈칭숭은 마샤오톈을 ‘컨트롤타워의 소년단장’으로 소개했다. 전투기에 올라타던 그의 흑백 영상을 기억하는 중국인들은 아직도 많다.
궈칭숭은 당시 중국사회에 큰 화제를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마샤오톈은 단숨에 공군의 스타로 떠올랐다. 공군 사병은 물론 장교와 지도자들까지 모두 마샤오텐을 머리속에 기억하게 됐으며, 이로 인한 좋은 인상이 그의 초고속 승진을 재촉했다.
그는 34세의 젊은 나이에 1983년 공군항공병사단 부사단장에 올랐고 사단장까지 진급했다. 그리고 45세이던 1994년 공군 제10군 참모장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그는 1997년 공군 부참모장으로 승진됐다. 이듬해인 1998년에는 광저우(廣州)군구 공군참모장으로 이동해갔으며 그해 11월 광둥(廣東)성 주하이(珠海) 에어쇼에서 49세의 마샤오톈은 스스로 수호이30 전투기를 몰아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1999년 란저우(蘭州)군구 부사령관으로 이동해갔고 2000년에 중장으로 진급했다. 2001년 난징(南京)군구 부사령관을 거쳐 2003년 인민해방군 공군 부사령관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2007년 장친성(章沁生)의 후임으로 인민해방군 부참모장에 제수됐다. 그리고 그는 2009년 류샤오치(劉少奇) 전 총서기의 아들인 류위안(劉源) 총후근부 정치위원, 혁명원로 장전(張震)의 아들인 장하이양(張海陽) 청두(成都)군구 정치위원과 함께 상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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