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기행 17-안후이성편> 1-1 난공불락의 ‘철옹성’ 허페이 신성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입력 2012-02-06 12:58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아주경제 홍해연 기자) 황산(黃山)으로 인해 한국인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진 안후이(安徽)성. 그러나 안후이가 ‘천하삼분(天下三分)’의 한 축이었던 위(魏)나라의 중심 무대중 한 곳임을 아는 이는 드물 것이다. 본지 '걸어서 삼국지 기행' 취재팀은 위나라의 시조(始祖) 조조(曺操)와 신의(神醫) 화타, 오(吳)나라 장수 주유(周瑜)의 고향이 있는 안후이성으로 삼국지 취재의 여정을 떠났다.

취재팀을 태운 항공기는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한뒤 두 시간이 넘는 비행끝에 허페이(合肥) 뤄강(駱崗) 공항에 도착했다. 삼국지의 무대를 찾는다는 설레임과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첫 방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후이성의 허페이시는 그다지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수속을 마치고 공항 청사를 나서자 뿌연 안개속에 축축한 습기가 살갖에 와 닿는다. 그러고 보니 허페이는 방금 전 비행기에서 내려다 봤을때도 짙은 안개 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중국 대륙 동남쪽에 위치한 안후이성의 성도(省都 성의 수도) 허페이시. 토지가 비옥하고 성 중앙으로 중국 5대 담수호 중 하나이자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 불리는 차오후(巢湖)가 자리잡고 있어 삼국 시기 이 곳을 차지하기 위한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공항에서 숙소가 있는 시내로 향하는 길에서 보니 완(晥, 안후이성 약칭)자 번호표를 단 차량들이 쉴새없이 오가고 있었다. 안후이성 삼국지 무대로 취재왔다는 사실이 상기되면서 불끈 주먹이 쥐어졌다. 곳곳에 아파트 건설이 한창인 허페이시의 저녁은 서울과 별반 다를게 없어 보였다.

이튿날 취재팀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삼국유적공원(三國遺址公園). 이 공원은 조조의 군대가 주둔ㆍ훈련하던 신성(新城)의 터 위에 조성된 곳으로 허페이시 중심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시원스럽게 뚫린 외곽 도로를 지나 공원 입구로 들어서자 무엇보다 중앙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동상이 취재진의 눈길을 끈다.

삼국유적 공원 입구에 세워진 조예, 만충, 장영의 동상.


깃발을 휘날리며 금방이라도 말을 타고 전장을 내달릴 듯 생동감 넘치는 동상속의 주인공들은 위 나라 최초의 황제 조예와 위나라 최고의 장수로 손꼽히는 만충(萬忠), 장영(張潁)이었다.

세 장수가 타고 있는 말은 돌 받침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수망회양(守望淮揚)’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안내원에 따르면 회양은 당시 위군의 세력이 뻗치던 지역을 뜻하는 것이었다. 수망회양은 조예 만충 장영 세 사람이 회양을 지키고 있다는 뜻이라고 했다. 오늘 날 창장(長江) 유역이 바로 회양에 속한다. 등을 맞댄 세 장수의 모습에서 영웅의 기백이 느껴졌다.

흙을 쌓아올려 만든 성곽은 나무가 심어진 둔덕으로 변했다.


"신성은 허페이시에 남아있는 삼국시대 유적 중 당시의 모습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습니다. 남북 직선 길이는 420m, 동서 길이는 210m로 전체 면적이 10만㎡에 달하지요" 공원 관계자가 설명했다.

위 촉 오 삼국이 천하를 삼분했던 시기, 위군과 오군은 창장의 중하류에서 대치하며 장화이(江淮, 지금의 안후이성과 장쑤성 일대)의 비옥한 토지를 손에 넣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오나라의 손권이 강동(江東)을 차지한 이후에는 장화이 일대를 점령하기 위해 여러차례에 걸쳐 허페이를 공격했다.


"허페이시 쓰리허(四里河) 부근에는 원래 위나라 백성의 거주와 상업의 중심이었던 성이 하나 더 있습니다. 원래 있던 성을 ‘노성(老城)’, 나중에 생긴 이 곳은 신성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안내원의 설명이 이어졌다.

성곽 외부를 강이 에워싸고 있다.


성곽 외부로는 작은 강이 하나 흐르고 있다. 지금은 2m 남짓한 폭이지만 삼국시대만 해도 안후이성 부근 강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며 수만 명의 군사를 태운 배를 띄울 정도로 큰 강이었다.

수전(水戰) 병술이 뛰어난 오나라 군대를 육지로 끌어들여 전투를 벌이기 위해 일부러 이 곳을 신성의 터로 삼았다고 한다.

삼국지는 신성이 지어진 이후 오나라 군대가 세 차례에 걸쳐 신성을 공격했지만 오나라 군대는 번번히 위군에 패하고 말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군이 적벽대전에서 오군에 맛보았던 치욕을 이 곳에서 확실하게 씻은 셈이다.

관계자가 삼국시기 허페이의 위치와 역할을 설명해주고 있다.


오나라의 첫 공격은 233년. 군주 손권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강을 건넜다. 그러나 육지에 다다를 무렵, 새로 생긴 성곽에 손권과 그의 군사는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전략에 차질이 생기자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20여 일을 배 위에서 지내면서 기회를 엿봤지만 돌아온 것은 위군의 역습이었다.

성 안에서 일찌감치 손권의 동태를 파악한 위나라 장수 만충은 병사 6000명을 잠복 시켰고 순식간에 오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속수무책으로 위군에 쫓겨온 손권은 절치부심하며 복수의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234년, 손권은 촉이 위를 친 틈을 타 10만 대군을 이끌고 신성 공격에 나섰다.

위풍당당하게 강을 건넌 손권은 신성을 에워싸고 성 내부로의 진입을 시도했지만 만충과 장영이 지도하는 위군의 반격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위군은 기름을 발라 불을 붙인 솔가지 더미를 오나라 군대를 향해 투척했고 때마침 순풍을 만난 거세진 불길이 오나라 군대를 무섭게 휘어 감았다.


강 위에 새로 놓인 다리 위에 서서 그 옛날 이 곳에서 벌어졌을 치열한 전투를 상상하니 병장기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듯 하고 전투의 장면들이 주마등 처럼 뇌리에 스쳐지나간다. 좁은 물줄기가 거대한 강으로 변하며 그 위로 붉은 깃발을 내걸고 북과 나팔 소리를 울리는 군함의 모습도 보이는 듯 했다.

280년 삼국이 진(晉)왕조에 역사의 무대를 내어줄 때까지 신성이 존재한 시간은 불과 50년. 그러나 신성은 위나라의 마지막까지 외부의 침입을 막아내며 주어진 사명을 다한 '난공불락'의 '철옹성'이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