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삼국지기행 38 허난성편> 6-1. 제갈량 초려에서 10년, 삼분지계를 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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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2-03-08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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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삼국지 초반은 조조(曹操)의 일방적인 승리가 이어진다. 208년, 조조와 가장 선명하게 대립각을 세웠던 유비(劉備)는 연전연패한 후 3000여명의 군사만을 이끌고 신야(新野)에 은거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비는 유표(劉表)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군사력을 불릴 수도 없었다. 강동의 손권(孫權) 역시 그 실력이 아직 드러나고 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자연스럽게 조조의 천하통일이 대세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그해 삼국지는 유비가 제갈량(諸葛亮)을 모사로 영입하면서 반전을 거듭하게 된다.

유비 휘하에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조운(趙雲) 등 당대 최고의 무인들이 포진해 있었지만 대세를 읽고 작전을 기획하는 문신은 약체였다. 훌륭한 전략가에 목말라하던 유비는 제갈량의 소문을 듣고 그의 초려에 세번을 찾아간 끝에 영입에 성공한다. 당시 유비의 나이 47세였고, 제갈량은 그에 비해 20살이 어린 27세였다.

유비가 삼고초려했던 제갈량의 초려는 허난(河南)성 난양(南陽, 남양)시에 위치해 있다. 제갈량은 이 초려에서 10년동안 농사를 지으며 학업을 이어갔다. 후대 사람들은 초려가 위치해 있던 워룽강(臥龍崗, 와룡강)에 무후사(武候祠)를 짓고 제갈량을 기리고 있다. 본지 '걸어서 삼국지 기행' 취재팀은 와룡강 앞에서 차에 내렸다. 와룡강은 남양시 시내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위치한 느슨한 언덕배기를 칭하는 지명이다.
허난성 남양 무후사의 전경모습. 중국에 있는 무후사 10곳중 이곳의 규모가 가장 크다.

와룡강에 들어가면 무후사라고 쓰여진 커다란 입구가 보인다. 무후무후사는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을 총칭한다. 제갈량이 살아있을 때 무향후(武鄕侯), 사망 후에는 충무후(忠武侯)라는 관작을 받은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중국에는 모두 10곳의 무후사가 존재한다. 승상으로서 활동했던 촉(蜀)나라의 수도였던 쓰촨(四川)성 청두(成都), 삼고초려의 또 다른 장소로 지목되고 있는 후베이(湖北)성 샹양(襄陽), 유비가 사망한 충칭(重慶) 백제성(白帝城), 맹획(猛獲)을 칠종칠금(七縱七擒)했던 윈난(雲南)성 바오산(保山), 출사표를 내고 북벌에 나섰던 간쑤(甘肅)성 치산(기산, 祁山), 그리고 제갈량이 사망한 곳인 산시(陝西)성 치산(岐山)의 우장위안(五丈原, 오장원)에 무후사가 건립돼 있다. 이 밖에도 산시(陝西) 몐(勉)현, 산시 청구(城固), 후베이 황링(黄陵)에도 무후사가 있다. 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 남양의 무후사다.
허난성 남양 무후사에 있는 유우석의 명시 '누실명'의 석비. 이 시에는 남양 제갈량의 초려 이야기가 나온다.

무후사 안에 들어가면 커다란 바위에 새긴 시 누실명(陋室銘)이 관광객을 맞는다. 회색의 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적혀 있는 누실명은 당(唐)의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대표적인 시다. 이 시는 허명과 공명을 멀리하고 스스로의 수양을 독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山不在高, 有仙則名, (산불재고, 유선즉명. 높지 않은 산이라도 신선이 있다면 이름이 나고,)
水不在深, 有龍則靈. (수불재심, 유룡즉령.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있으면 영험하다.)
중략
南陽諸葛盧, 西蜀子雲亭. (남양제갈량, 서촉자운정, 남양 제갈량의 초려, 서촉 자운의 정자가 초라하지만)
孔子云, 何陋之有. (공자운, 하루지유,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무슨 누추함이 있으리오.)

이 시에는 제갈량의 초려가 등장한다. 제갈량의 초려가 초라했지만 이 곳에서 제갈량은 수양을 거듭해 촉한의 명재상으로 거듭나게 됐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제갈량의 초려가 남양에 있음을 명시했다.

누실명 석비를 지나쳐 20m정도 걸으면 또다른 석비가 등장한다. 큼지막한 글씨로 ‘신본부의, 궁경남양(臣本布衣,躬耕南陽. 신은 본래 평민이었고, 남양땅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라는 여덟자가 새겨져 있다. 이 구절은 제갈량이 쓴 출사표(出師表)에 나오는 구절이다. 석비의 글씨는 남송(南宋)의 장군인 악비(岳飛)가 썼다.
허난성 남양 무후사에 있는 출사표비랑. 송나라 장군이자 서예가인 악비가 출사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쓴 글을 석각에 조각해 뒀다.

공원으로 꾸며놓은 무후사의 호수를 지나면 출사표비랑(出師表碑廊)이 나온다. 악비가 친필로 쓴 출사표를 음각 해놓은 조각들이 복도에 전시돼 있다. 악비는 허난성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사병에서 시작해 불세출의 장군까지 성장했다. 금(金)나라가 송을 위협해 중국 북쪽 지역을 모조리 차지했던 남송시대의 장수다. 무기력하게 연전연패하던 송나라는 악비라는 명장을 만나면서 금의 군사를 패퇴시킨다. 중국의 구국 영웅으로 존경 받으며 서예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악비가 이곳 남양 무후사를 들러 출사표를 다시 읽고는 감동의 눈물을 흘린 후 자신의 필체로 출사표를 다시 썼다. 그리고 이를 기리기 위해 악비가 쓴 출사표를 석재에 조각해 넣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 석비를 보고는 “출사표는 본래 내용이 깔끔하고 충실한데다가, 악비의 친필이며, 조각이 훌륭하다”고 찬사를 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두번의 출사표를 작성했다. 두번째 출사표를 ‘후출사표’라고 한다.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가 즐겨 인용했던 ‘쥐궁진추이, 쓰얼허우이(鞠躬盡瘁,死而後已. 죽을 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하다)’라는 말은 후출사표에 나온다.
허난성 남양 무후사에 있는 제갈초려의 모습. 이 곳에서 제갈량은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고 세상에 나서게 된다.

무후사 정중앙에는 제갈초려(諸葛草廬)가 위치해 있다. 이 곳이 바로 유비가 제갈량을 처음 만났던 곳이다. 제갈암(諸葛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제갈초려의 지붕은 8각으로 이뤄져 있다. 팔괘진을 본뜬 것이다. 제갈초려라는 편액은 1973년 중국 현대의 유명한 소설가인 궈모뤄(郭沫若)가 썼다.

유비가 제갈량을 두번 찾았지만 두차례 모두 제갈량이 부재했다. 세번째 찾았을 때 마침 제갈량이 초려에 있었지만 그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깨우지 않고 이 곳 초려 바깥에서 한 시신(一時辰, 2시간) 쯤 서서 기다렸다. 제갈량은 그제서야 잠에서 깨어나 유비를 대면한다. 29세 제갈량은 유비를 만나 천하삼분지계를 설명한다. 손권과 연합해 조조에 대항한 후 형주와 익주를 기반으로 삼아 한실부흥의 대의명분을 앞세워 삼국을 정립한 후 천하를 도모하자는 것. 청년 제갈량의 거침없는 계책에 유비는 10년 묵은 체증이 꺼지고 자욱하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이 순간부터 유비는 더 이상 ‘떠돌이 군소집단’이 아니었다.

주인의 그릇을 시험해보기 위해 유비를 삼고초려하게 만든 제갈량,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한 유비. 1800년전 둘은 이 초려에서 긴장감 넘치는 대면을 했을 것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차 손을 잡고 초려를 나섰을 것이다. 유비가 제갈량과 함께 초려를 나서며 흘렸을 감격의 눈물이 이 땅에 스며들었을 것이다.
허난성 남양 무후사 영원루 안의 밀랍인형 모습. 제갈량이 낮잠을 자고 있는 동안 유비가 초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남양무후사에는 제갈초려를 둘러싸고 여러 개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영원루(寧遠樓)는 제갈량이 책을 읽고 가야금을 타던 곳이다. 이 곳 안에는 밀랍인형으로 삼고초려의 장면과 제갈량 가족들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제갈량의 형인 제갈근(瑾)은 손권(孫權)의 책사로 활약하며 동생인 제갈균(均)은 위(魏)나라의 모사로 활동한다. 삼형제가 각각 위, 촉, 오에서 문관으로 이름을 떨쳤던 것이다. 제갈량의 아들인 제갈첨(瞻)은 아버지를 이어 촉한의 무인으로 활약한다. 263년 27세의 나이로 위나라 장수인 등애(鄧艾)와 싸우다 사망한다. 제갈량의 손자인 제갈상(尚) 역시 아버지와 함께 사망한다.
허난성 남양 무후사에 있는 반월대의 모습. 이 곳에서 제갈량은 천문을 공부했다.

주 건물인 대배전(大拜殿)에는 머리에 비단띠를 두른 두건을 쓰고 깃털 부채를 손에 들고 푸른색 팔괘도포를 걸친 제갈량의 소상(塑像)이 안치돼 있다. 제갈초려 우측에 있는 반월대(半月臺)는 제갈량이 천문공부를 하던 곳이다. 제갈량의 천문실력은 정확한 기상예측으로 이어졌다. 적벽(赤壁)대전에서 제갈량이 동남풍을 빌었던 것은 그의 천문실력이 뛰어남을 반증한다. 이곳을 찾으니 별을 보며 기상을 관측했을 청년 제갈량의 모습이 그려진다.
허난성 남양 무후사에 있는 관장전의 모습. 이 곳에서 관우와 장비는 제갈량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유비를 불만스러운 눈으로 지켜봤다.

유비가 제갈량을 삼고초려하던 당시 관우와 장비는 제갈량의 안아무인격 무례를 흠잡으며 불만스러운 모습으로 초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관장전(關張殿)에는 목불위오(目不魏吳, 위나라와 오나라를 눈에 두지 않다)라는 큼지막한 현판이 걸려 있다. 관장전 문에 붙어있는 대련(對聯)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글귀가 적혀 있었다.

師臥龍友子龍, 龍師龍友. (사와룡우자룡, 용사용우. 와룡을 스승으로 삼고 자룡을 친구로 여기니 용을 스승과 친구로 두고 있네.)
兄玄德弟翼德, 德兄德弟. (형현덕제익덕, 덕형덕제. 현덕을 형으로 익덕을 동생으로 두고 있으니 덕을 형제로 두고 있네.)
허난성 남양 무후사에 있는 고백정의 모습. 제갈양이 농사를 지었다는 곳으로 안에는 후진타오 주석을 비롯한 국가지도자들의 방문모습 사진이 걸려있다.

후세사람들이 대련을 통해 재미있는 표현으로 관우를 설명한 것이다. 제갈초려 좌측에는 고백정(古柏亭)이 눈에 띈다. 원래 측백나무가 한그루 있던 곳으로 제갈량이 이 곳에서 친히 씨를 부리고 농사를 지었던 곳이다. 고백정 안에는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이 남양무후사를 찾은 사진을 비롯해 정치인들의 방문사진과 기록들을 전시해 놓았다. 특히 후진타오 주석은 2007년 4월 무후사를 40여분간 둘러보며 벽이 갈라진 곳이나 보수가 필요한 장소를 세심히 지적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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