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지도자 대해부> 中 왕치산, 부패척결 칼날 휘두를 ‘포청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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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5-01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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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치산
아주경제 배인선 기자 = 시진핑(習近平) 총서기의 5세대 지도부가 들어선 이래 지난 50여일 간 리춘청(李春城) 쓰촨(四川)성 당부서기가 뇌물수수 혐의 등 ‘엄중한 기율 위반’으로 면직당한 것을 비롯해 수십 명의 중앙 지방 관료들이 부정부패 혐의로 줄줄이 당국에 체포돼 조사를 받았다.

중국 공직사회에 불어닥친 부패척결 운동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바로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원회(중앙기율위) 서기다.

중앙기율위는 당의 감찰기구로 일종의 감사원 성격의 조직이다. 당 관료의 부패와 비행을 막고 당풍을 유지하는 것이 임무다. 중국 공산당 관료를 조사할 때 수사권과 체포권을 발동한다.

최근 들어 중국에선 보시라이(薄熙來) 일가의 부정부패를 비롯해 원자바오(溫家寶) 일가 축재설 등 중국 고위층 부패설이 연이어 터져 나오자 중국 인민의 불만은 극한에 달하고 있다. 민중의 폭발은 중국 공산당 체제 안정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아는 중국 당국은 왕치산을 중앙기율위 서기로 임명해 부패 척결의 칼자루를 쥐어줬다. 왕의 능력에 대한 당 지도부의 높은 신뢰를 보여준다. 중앙기율위 서기의 파워도 세졌다. 이번 5세대 지도부에서 왕치산의 권력 서열은 6위다. 앞서 중앙기율위 서기를 맡았던 허궈창(賀國强)의 서열은 8위에 그쳤다.

‘특급 소방수’, ‘구원투수’, ‘폭탄 제거전문가’, ‘위기 해결사’는 왕의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다. 중국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는 탁월한 능력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1997년엔 금융위기로 혼란에 빠진 광둥(廣東)성에, 2003년엔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가 창궐하는 베이징(北京)에 파견돼 특유의 결단력과 카리스마로 위기를 극복했다.

중국에서 부패척결은 실로 어려운 작업이다. 중국 공산당은 수십 년간 당내 만연한 부패로 고심해왔다.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이그나티우스는 최근 한 칼럼을 통해 올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바로 중국 신임 중앙기율위 서기인 왕치산의 업무”라며 “중국 내 부패척결은 거의 실현 불가능한 것”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그래서 중국 민중들은 부패척결 선봉장인 왕에게 더욱더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다. 신화통신 역시 최근 왕치산 소개 글에서 “왕치산, 그라면 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지난 11월 18차 1중전회 후 열린 인민대회당 기자 대면식에서 왕치산은 푸른빛 넥타이를 맨 채 나타나 서슬 퍼런 반 부패 칼날 휘두르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취임 후 첫 가진 업무회의에서 왕은“부패 척결은 당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엄중한 정치투쟁"이라며 "고위층의 부정부패를 엄중히 다스리고 효과적으로 예방하는 시스템을 확고히 갖춰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왕이 18차 당대회서 중앙기율위 서기에 임명된 것은 의외였다. 그 동안 왕은 경제금융 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다들 그가 금융경제 부총리가 돼 리커창(李克强)을 보좌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만큼 그의 경제운용 능력이 실로 뛰어났기 때문이다.

왕치산은 시베이(西北)대 역사학과를 졸업해 박물관에서 근무했을 만큼 역사학도다. 그가 경제금융 분야에 눈을 뜬 것은 1982년 당 중앙서기처 농업정책 연구실에서 근무하면서부터다. 이후 건설은행 부행장, 인민은행 부행장, 건설은행장 등 경제 금융 관료 코스를 밟아왔다. 특히 건설은행 부행장 재임 당시 상하이에 파견돼 금융산업 발전방안을 발표하면서 주룽지(朱鎔基) 전 총리의 신뢰를 얻게 된다. ‘주룽지 사단’의 맏형 뻘인 왕은 주룽지를 빼 닮은 결단력과 카리스마로 ‘리틀 주룽지’로 불린다.

2007년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돼 무역·금융업무를 관장하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을 발휘했다. 미국과의 무역분쟁에서도 당당하게 대처했다. 티머시 가이트너 미국 재무장관은 그를 “문제를 푸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로 확실히 대단한 해결사”라고 높이 평하기도 했다.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시가 고향인 왕은 문화대혁명 발발 당시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으로 하방되는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야오이린(姚依林) 부총리의 딸인 야오밍산(姚明珊)과 인연을 맺어 결혼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훗날 야오이린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왕치산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장인의 후광으로 왕치산은 태자당으로 분류된다.

◆주요약력 ▲1948년 산둥성 칭다오 출생 ▲1976년 시베이대 역사학과 졸업 ▲1982~1986년 당 중앙서기처 농업정책 연구실 근무 ▲ 1988~1989년 농촌신탁투자공사 총경리, 당서기 ▲1989~1993년 건설은행 부행장 ▲1993~1994년 인민은행 부행장 ▲1994~1997년 건설은행 행장 ▲1998년 광둥성 부성장 ▲2000년 국무원 경제체제개혁 판공실 주임 ▲2002년 하이난성 당서기 ▲2003년 베이징 시장 ▲2007년 중앙정치국 위원, 국무원 부총리 ▲2012년 정치국 상무위원, 중앙기율위 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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