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중 전차바퀴와 군화에 짓밟힌 땅위에 급히 피난을 가느라 벗겨진 고무신도 보이고 그 위에 개미들이 죽어 있거나 방향을 잃은 채 여기저기로 흩어지고 있다. 전쟁의 비인간적인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故원석연 作, 1950년, 64x147cm, 종이위에 연필, 1956) |
아주경제 박현주 기자=60여년 동안 오로지 연필로만 그림을 그렸다.
동료작가들 사이에서 ‘괴벽이’, ‘대꽂이’, ‘바카쇼지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원석연(1922~2003)화백이다.
흰 종이에 연필로 실물 크기의 개미 한 마리만을 그려놓고 같은 크기의 유화 작품과 동일한 가격이 아니면 팔려고 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꼬박 그린 초상화를 초상의 주인이 수정을 요구하자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던 자존심 강한 화가였다.
그는 연필선에는 ‘음과 색’이 있고 또 ‘일곱 가지 빛깔 있다’며 연필의 무궁무진한 표현가능을 찬미했고“누가 뭐래도 나는 연필 하나로 하나의 완성된 회화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호텔 옆 환구단”, 조선호텔이 지어질 당시 조선시대 때 하늘에 제를 지내던 환구단을 단순하면서도 힘있게 묘사했다. 연필선 하나하나에 의미를 가지고 대상을 드러내고 있다. |
원 화백의 '연필화'는 연필에 대한 작가의 무한한 신뢰로 감동을 선사한다.
사물의 피부를 재현한듯 한 연필화는 시지각의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다. 단순히 대상의 윤곽이나 인상을 기록하는 정도를 넘어 연필선의 강약, 농도, 밀도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대상의 윤곽, 질감, 양감과 움직임이 살아있는 듯 꿈틀댄다.
원석연의 이름이 부각된 건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 시작한 '개미' 연작이었다. 그가 '개미화가'로 불리게 된 이유다.
실물 크기로 정밀하게 그려진 수백, 수천 마리의 개미들이 떼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보는 사람들의 찬탄을 불러 일으켰다. 참화가 지나간 자리를 뒤엉켜서 발버둥치며 전진하는 개미들의 모습은 엄혹한 현실을 헤쳐나가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난 그는 열다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웠다. 스물두 살에 귀국한 후 서울 미공보원에서 근무하면서 미군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리다 1947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의 ‘개미’ 그림은 6·25전쟁 중 부산 피란시절부터 시작됐다. 1963년 미국 리처드 닉슨(1968년 제37대 대통령 당선)의 초상화를 그려 미국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해진 그는 개미뿐 아니라 마늘, 엿가위, 호미, 초가집 , 박정희 생가등의 그림으로 인기를 끌었다.
81세로 세상을 떠난지 10년. '연필화'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수 있는 고 원석연 화백의 10주기 추모전이 20일부터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열린다.
아트사이드 임대식 큐레이터는 "연필이라고 하는 재료적 한계를 극복하고 고집스럽게 연필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모색해 온 고 원석연 화백의 집념과 그 연필로 그려낸 시대정신을 보여주고자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추모전과 함께 원석연 화백의 화집(열화당)도 발간됐다. 전시는 7월 28일까지.(02)7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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