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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동양그룹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왼쪽)과 현재현 동양그룹 회장> |
재계에 따르면 그룹 창업주인 고 이양구 동양시멘트 사장은 1971년 9월 10일 전격적으로 서울지방법원에 현재의 법정관리와 유사한 회사정리신청서를 제출하며 법원 관리에 들어갔다.
정부의 장기 긴축정책에서 빚어진 산업계의 불황 무드와 시멘트 업계의 심각한 경영부진에서 온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해석도 있었지만 이 사장이 회사정리신청에 이르기까지 보여준 경영태도와 관련해 대기업, 기업인으로서의 책임을 성실하게 실행하지 못했다는 점이 부각됐다.
당시에도 국내 20위권 내에 드는 대기업이었던 동양그룹은 동양시멘트를 주축으로 오리온제과, 동양스레트, 동양건진 등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동양시멘트 1개사의 외형 거래액은 1969년 62억6500만원, 1970년 58억2700만원에 달했고 그룹 전체의 연간 외형 거래액 총 누계는 100억원 이상을 기록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양시멘트가 사전 예고도 없이 이날 전격적으로 법원 관리를 자처한 것인데, 당시 동양시멘트의 부채는 은행채가 30억원, 사채가 25억원이었다. 은행 빚도 많지만 그 때도 당연 사채 비중이 높은 것이 문제였다.
후일 이 사장은 이 때 동양시멘트는 부채를 갚을 수 어려웠다고 해명했다. 동양제과 등 직계·방계회사(현 계열사)의 동반 경영부진도 원인이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회사에 투자했던 피해자와 여론은 과연 이 정도의 부채를 책임질 수 없을 만큼 동양시멘트가 어려웠느냐에 의혹을 제기했다. 은행채는 연기 가능한 부채였고, 사채의 대부분은 이 사장이 잘 아는 인사들에게서 조달한 것이 아니면 회사 사원들의 출자에 의한 것이었던 만큼 이 사장이 좀 더 노력했다면 회사정리절차까지 갈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회사정리절차 직전까지 이 사장과 동양시멘트가 보여준 행태는 결정적으로 국민적 분노를 샀다. 동양시멘트는 회사정리신청 수 개월전부터 산하에 있던 100여개 특약점을 통해 시멘트 현품도 없이 당시 시세에 비해 덤핑이라고 할만한 수준인 자루당 170원의 가격에 시멘트를 공급하겠다는 예매정표를 남발했다. 회사정리신청후 시멘트 현품 공급이 중단되면서 특약점은 거래처에 제품을 공급하지 못했고, 이들 특약점은 계약관계를 해지하고 싶어도 동양시멘트와 거래관계를 맺으며 지급한 500만원의 계약금을 돌려 받지 못해 부도 사태를 빚어냈다.
현재의 동양그룹이 계열사 동양증권을 통해 거액의 계열사 기업어음(CP)을 일반인에게 판매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또한 회사는 충분히 생존 가능하다고 공헌하며 직원들에게 출자를 촉구해 주주를 만들었는데, 이들도 회사정리신청후 출자금을 고스란히 날릴 수 밖에 없는 위기에 처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이 사장은 일부 아는 인사들에게서 빌려온 사채를 회사정리신청 직전에 먼저 지급하기도했으며, 특히 회사정리신청을 내기 불과 한시간 전까지도 동양시멘트 명의로 30만원짜리 사채를 빌어썼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양시멘트에 대해 재계는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며 분노했고, 대기업들도 자신들에 대한 불신감이 조성돼 신용거래 기반이 무너질 것이라며 우려했다.
특히 회사정리절차를 신청한 뒤 이 사장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나서기는커녕 행방을 감추기까지 했는데,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한 채권자들은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에 소재한 이 사장의 집으로 몰려가 “빚을 갚으라”고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또한 기업회생절차 신청 후 출입기자들에게 해명 이메일만 보내놓고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위 현재현 회장의 상황과 비슷하다. 동양증권 직원과 CP 투자자들은 서울 성북동 현 회장의 자택을 찾아가 면담을 요청하며 농성을 벌였지만 그를 만날 수 없었다.
이 사장에 대해 국민이 분노한 이유는 “기업은 죽어도 기업인은 살겠다”는 식으로 마지막까지 회사의 회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대신 기업인 스스로 회사가 조금 어렵다고 법원 또는 은행관리를 자처하고서 자신은 살겠다는, 현실도피적인 모습으로 비쳐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동양시멘트는 일제시대에서 해방된 후 국가에 귀속된 시멘트 공장을 정부로부터 불하 받은 회사였다는 점에서 비난의 강도는 더욱 셌다. ‘적산기업’으로 불리는 이들 불하 사업체들은 기업에 대한 특혜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장은 석 달을 채 못 넘기고 동양시멘트에 대한 회사정리 신청을 철회하고, 방계회사 매각 등 자구노력을 통해 부채를 갚고 동양시멘트를 살리겠다고 밝혔다.
이러한 위기를 겪은 동양그룹이 부활한 것은 과연 이 사장의 노력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듬해인 1972년 8월 3일 당시 고리사채에 허덕였던 기업을 지원한다는 명목하에 모든 사채를 동결한다는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동시켰다. 소위 말하는 ‘8.3조치’다.
회사정리 신청을 한 기업은 8.3조치의 수혜를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사장은 앞서 자발적으로 이를 철회함으로써 거액의 사채를 동결받아 살아날 수 있었다. 당시 언론들은“기업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기업은 쓰러져야 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제2, 제3의 동양사건이 또 나타날 것이다”고 숱하게 경고했다.
그리고 42년 뒤, 그 때의 경고는 현실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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