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화량 증대와 물가상승 간의 움직임은 사실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경제여건에 따라 인플레이션은 보다 천천히 올 수도 있고 혹은 조금 빨리 올 수도 있다. 1929년에 경험한 미국의 대공황도 지금처럼 과도한 유동성과 민간부채, 자산가격의 거품에 기인했는데 이를 수습해 가는 방법 역시 지금과 같은 통 큰 화폐증발이었다. 1930년대에 펼쳐진 이 과감한 통화팽창은 결국 1940년대에 이르러 가공할 물가상승으로 나타났다.
새해를 앞둔 지금 금융시장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인플레이션 그 자체보다는 인플레이션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질 화폐적 현상과 반응이다. 지금 미국을 비롯해 각국 중앙은행들이 간절히 바라는 바는 바로 경제주체들이 디플레 기대심리를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려 있든 말든 자기와는 상관 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당장 자신의 일자리가 불안정하고 지갑이 얇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에 결국 사람들은 디플레이션 기대심리를 버릴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장기간 진행된 저금리와 저물가가 가계에 계속 보조금을 지급해주는 효과가 누적돼 왔다는 것이다. 또한 경제 내에 최소한의 수요증대로 미뤄졌던 소비와 투자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낮아진 재고를 메우기 위한 생산활동과 자산가치 상승으로 인한 자산소득 효과가 이 저금리 체제하에서 경기회복의 촉매가 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경기가 위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틀면 사람들은 크게 늘어난 화폐에 대한 신뢰를 버리게 된다. 더욱이 저금리는 낮은 자본조달 비용을 뜻하므로 경기가 풀릴 것이란 기대와 화폐가치 하락기대감이 만나면 민간신용(대출)이 늘어난다. 그래서 우리의 주 관심은 경기의 절대수준보다는 방향성이다. 경기의 하방 위험이 줄어들수록 위험자산을 향한 유동성 규모는 늘어날 것이다. 거대 유동성이 일단 움직이면 금융시장의 분위기는 ‘위험선호’ 쪽으로 대담하게 기울 것이다. 결국 완만한 금리상승은 채권시장으로 들어갈 자본의 유입규모를 줄이고 주식이나 실물로 향하는 자본유입을 독려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완만한 금리상승과 경기회복의 조합이 형성되는 내년에는 한국으로 향하는 글로벌 자본의 힘이 좀 더 강해질 것이다.
1929년 대공황 이후 사상 두 번째로 통 큰 유동성 팽창이 어쩌면 지금 이순간에도 괴물 같은 거대한 인플레이션을 잉태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화되는 안되든 일단은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현금이나 채권을 버리고 실물자산을 선호하는 대순환(Great Rotation)의 현상은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인플레가 경기에 대한 부담으로 다가오기 전 통화량이 여전히 풍부한 내년이 바로 이러한 자산시장에 모종의 변화가 일어날만한 최적의 기간이다. 내년 시행이 예상되는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통화긴축의 첫 단추라는 측면에서는 글로벌 증시에 얼핏 부담처럼 보이지만 그 속도나 규모가 제한적일 것이란 점에서 유동성이 크게 줄어들 가능성은 적다고 본다.
경기에 대한 신뢰회복과 인플레이션 기대 정도에 따라 글로벌 자본이 신흥국으로 이동하는 과거 패턴을 고려할 때 지금 글로벌 유동자본의 신흥국 이동은 그 시작단계에 불과한 듯하다. 앞으로 경기회복과 물가상승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더해질수록 선진국 채권으로 유입되는 자본의 양보다는 선진국주식, 또는 신흥국 주식으로의 자본전환이 보다 크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