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안선영 기자 = 드라마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에서는 허당기 넘치는 엄친아, '전우치'(2013)에서는 주인공에게 앙심을 품은 악역, '직장의 신'(2013)에서는 성실한 마케팅 영업지원부 팀장까지 캐릭터의 극과 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안방극장을 압도했던 배우 이희준(35)이 지난 11일 종영한 JTBC 월화드라마 '유나의 거리'(극본 김운경·연출 임태우)에서는 더없이 착한 사나이 창만으로 시청자를 만났다.
유나(김옥빈)만을 사랑하는 순정남이자 다세대 주택을 지키는 기둥 같은 창만은 드라마에서 가장 비현실적 인물이다. 하지만 착한 남자 한 사람이 어디까지 변화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진정성 있게 보여 주며 시청자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지난 13일 서울 압구정동의 음식점에서 만난 이희준은 '유나의 거리'를 "소중한 수필 같은 드라마"라고 정의했다. 8개월 동안 창만 캐릭터에 푹 빠져 있던 이희준은 "그동안 못 보던 걸 보게 됐고, 덕분에 착해졌다"고 특유의 수더분한 웃음을 지었다. "사람은 적당한 기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선한 의지로 주변 사람들을 치유하고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창만의 모습도 보였다.
이희준은 중심을 잡고 '유나의 거리'를 완주한 공로를 자신의 곁에 있어 준 세 사람에게 돌렸다. 김운경 작가, 배우 김옥빈, 그리고 어머니였다.
# 김운경 작가
이희준은 창만 역에 대해 "세상엔 이런 사람이 없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극중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라는 말도 덧붙였다. 유나에게 서운한 일이 있어도 그저 침묵으로 다음 행동을 이어가는 창만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캐릭터가 왜 이런 행동을 했을지 이해하면서 연기를 해야 하는데 창만은 쉽지 않았어요. 저 자신이 창만을 이해하지 못하니 연기 자체도 힘들었죠. 김운경 작가님께 '창만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털어놓자 작가님이 '창만이는 이 시대의 희망'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차 싶었죠."
창만이는 누가 뭐라 해도,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하는 사람이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든 시간이지만 창만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도록 안간힘을 썼다. 그리고 김운경 작가의 말 한마디가 이희준이 창만에게 몰두하는 힘이 됐다.
이희준은 어느새 '사람은 적당한 기회만 주어지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창만이의 대사를 믿고 있었다.
# 배우 김옥빈
이희준은 자신보다 한참 어린 여주인공 김옥빈에게 연기 외적인 부분을 배웠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 '박쥐' 이미지에 갇혀 있던 김옥빈이 알고 보니 '샘이 날 정도로' 배울 것 많은 배우였다.
"김옥빈에게 기가 죽지는 않을까 겁이 났다"면서도 "어떤 사람일지 만나보고 싶었다. 팬으로서도 궁금한 게 정말 많았다"는 이희준의 바람은 '유나의 거리'를 통해 이루어졌다.
"저보다 한참 어린 동생이지만 정말 많이 배웠어요. 제가 연극을 할 동안 빈이는 드라마, 영화 경험이 많다 보니 스태프를 대하는 태도나 불만이 있을 때 대처하는 법에 능하더라고요. 베테랑이고 시원시원했죠. 스태프 모두가 저보다 빈이를 더 좋아해서 샘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하하."
이희준은 김옥빈의 연기를 '선명한 물감'이라고 정의했다. "내가 흰 도화지가 되어 주면 좋은 그림이 만들어질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나 아닌) 배우들 연기를 보는 게 신이 나기도 했고요. 가능한 내 색깔이 덜 드러나면 환상의 그림이 만들어 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죠"라고 말했다.
그의 선택은 옳았다. 이희준은 도드라진 상대배우를 통해 바탕인 자신마저 더욱 돋보이게 할 줄 아는 배우였다. 똑똑한 선택이었다. "제가 너무 무색무취라 아쉽긴 하지만, 오히려 창만이 제 모습을 지나치게 드러내거나 매력을 발산했다면 그게 이상하지 않았을까요? 작품을 중심에 놓고 볼 때요."
# 어머니
미술을 전공한 이희준의 어머니는 결혼과 육아로 꿈을 포기했다. 아들은 방향을 잃은 어머니께 4년 뒤 환갑에 함께 전시회를 열자고 약속했다. 어머니는 소녀처럼 열정에 불타올라 열심히 그림을 그렸고, 아들은 더 열심히 스케치북을 들고 촬영현장을 뛰어다녔다.
'유나의 거리'가 우리 이웃과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일까. 창만에 오롯이 빠진 이희준에게도 주변을 다시금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관찰의 대상은 그의 곁에 있는 모든 사람이었다.
"'유나의 거리'를 위해 노력하는 스태프와 배우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촬영감독님, 단역배우들, 장노인(정종준)…. 그 분들께 느꼈던 내 이야기, 전해 주고 싶은 말을 함께 적어 그림일기처럼 만들어 가고 있죠."
"특별히 그림을 배운 적은 없어 드로잉 실력이 엉망"이라며 머쓱해 했지만 그림 그리는 시간은 되레 이희준이 드라마에 몰두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사람들을 관찰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시간, 그리고 캐릭터 연구를 거듭하는 시간은 이희준이 배우가 되는 밑거름이 됐다. 4년 뒤 열릴 전시회가 벌써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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