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중국의 계몽잡지 '신청년(新靑年)'의 발간인이자 초대 중국공산당 서기였던 천두슈(陳獨秀)가 일본에 느낀 굴욕감을 1916년에 '통신(通信)'에 실은 글의 일부다.
이 글에서 천두슈는 외세에 대한 중국의 나약함을 각성하고 또 자만에 빠진 중국인들의 계몽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지난 31일 박근혜 대통령이 특보단, 청와대 참모진과의 오찬에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미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를 둘러싼 논란에 "언론 등에서 우리가 강대국 사이에 끼었다고 ‘큰일 났네’ 하는데 너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앞서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미·중 사이에서 눈치보기 외교를 한다는 비판에 대해 "고뇌가 없는 무책임한 비판"이라며 "(한국은) 러브콜을 받고 있고 이런 상황을 딜레마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윤 장관 발언의 취지 역시 박 대통령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자가 느끼는 문제점은 윤 장관의 '말실수'가 아니다.
그간 기자가 외교안보 부처와 산하 연구기관의 전문가들을 취재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돌아온 반응은 "왜 언론은 전혀 별개의 두가지 사안을 묶어 몰고가나"의 반응이었다.
물론 두가지 사안이 '바게닝 칩(비장의 카드)'으로 쓰일 만한 동등한 사안은 아니지만, 왜 언론과 여론이 이 사안을 같이 놓고 고민을 하는 것인지 모른단 말인가. 기자의 눈에는 정부의 '기본적 고뇌가 없는 몰이해'로 밖에 보이지 않다.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은 '외교 시험대'에 올려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외교당국이 이를 '축복 속 파티장'에 놓인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보기에 따라선 우리가 그 만큼 양국에 중요한 외교적 입지가 커진 것으로 보이지만 외교 게임은 쌍방향이 아닌 다(多)방향임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축배만 들다간 알던 것도 놓치게 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