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는 1979년에 (주)고베제강에 근무하는 것으로 사회에 첫 발을 디뎠고, 정치권에는 1982년 부친인 아베 신타로 외무대신의 비서관으로 입문했다. 1993년에 하원인 중의원 의원에 선출됐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관방 부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 출세 코스를 밟았다.
아베 총리는 관방 부장관 시절인 2002년 북·일 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을 계기로 보수층들에게서 높은 인기를 끌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이어 2006년 9월 26일 고이즈미 총재의 임기 만료로 치러진 경선에서 아소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를 큰 표차로 꺾고 자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아베 총리는 2007년 9월 12일 오후 2시, “내각총리대신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의 내각총사직을 표명한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같은 날로 예정되었던 정당 대표 질문이 불가능해졌다.
그는 사직의 이유로 “테러특별조치법의 재연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민주당의 오자와 대표와의 회담을 타진했지만, 사실상 거절당했고, 이대로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보다는 새 총리가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서 “내가 총리인 것이 장애가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의를 표한 다음 날인 9월 13일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검사 결과 위장 기능 이상의 소견이 보이며 상당히 쇠약해진 상태라고 의사단이 발표했다.
그러나 임시국회가 개막해 내정과 외교에 중요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국회에서 소신을 표명한 지 이틀 만에 총리직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발표한 것은 무책임했다는 여론이 잇따르기도 했다.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에 자유민주당의 총재로 임했다 열린 총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으며, 12월 26일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복귀한 지 1년이 되는 2013년 12월 26일, 선거로 공약한 대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기도 했다. 참배 후 그는 “일본을 위해 귀중한 생명을 희생한 영령에게 존숭의 뜻을 표했다”면서 “중국인과 한국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고 주장했다. 국가를 위해서 순사한 사람들의 영령을 위로하는 것은, 국가지도자로서 당연한 책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앞서 그는 1차 아베 내각 시절, 야스쿠니를 참배하지 못한 것에 대해 “통한의 극치”라고 밝힌 바 있다.
한편 아베 총리는 모리나가 제과 사장의 큰딸인 아키에와 결혼했다. 부인 아키에는 열렬한 한류팬으로, 겨울연가에 나온 고(故) 박용하의 팬이기도 하다. 아베 부부는 슬하에 자녀를 두지 않았다.
아베 신조는 우익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때문에 한일 관계를 파탄으로 이끌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한편으로는 관계 개선을 위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인터넷 프로필에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야키니쿠(불고기)라고 적는가 하면, 2013년 BS아사히와의 인터뷰 및 산케이신문과의 인터뷰를 야키니쿠 식당에서 갖는 등 한국과의 관계를 의식한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때로는 자신의 우익 이미지를 보완하기 위해, 한류 팬인 자신의 아내를 외교 행보에 활용해 친한(親韓) 이미지를 부각시키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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