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열 칼럼] 조용한 변화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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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1-0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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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정책조사실장)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정책조사실장)


통상적으로 변화는 시끄럽다. 추진하는 과정도 그렇지만, 결과도 시끌벅적한 경우가 많다.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발전과 도시화 과정도 대부분 그랬다. 겉만 번지르르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보여주기식으로, 전시행정으로, 시끄럽게 자랑하더니 몇년 후에 속을 들여다보면 곪아있고 비어있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대구의 ‘밀라노프로젝트’가 그랬고, 서울의 ‘뉴타운사업’이 그랬다. 이제 좀 조용했으면 좋겠다. 변화도 좀 조용하게 진행됐으면 한다. 겉보다 속이 튼실한 프로젝트를 기대해본다. 이제 그럴 때가 됐다.

1996년 여름 뉴욕 케네디공항에 도착해 입국수속을 받는 와중에 고향 1년 선배를 오랜만에 만났다. 뉴욕시립대 박사과정에서 인류학을 공부한다고 했다. 공항을 나오니 밤 12시가 다 됐는데 함께 가자고 한다. 뉴욕시를 제대로 구경하려면 ‘할렘’을 가봐야 한다며 한밤중에 그 무서운 곳으로 나를 데려갔다. 차에서 내려 걸어 다니기도 했다. 속으론 무서워 어서 나가자고 말하고 싶었지만,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답게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야”라며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는데, 말릴 수도 없었다.

그러나 뉴욕의 대표적인 슬럼가로 유명하고, 범죄소굴처럼 소문나 있던 할렘의 ‘조용한 변화’는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1993년부터 2000년까지 8년의 임기를 채우고 물러난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이 2001년에 ‘할렘’으로 이주했다. 할렘의 이미지를 바꾸고, 한단계 발전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2015년 현재 할렘은 과거의 할렘이 아니다.

2000년에 전주시가 한옥마을을 조성한다고 발표했을 때 전주시민은 긴가민가했다. 슬럼화돼가던 전주천 안쪽의 구(舊)도심을 활성화하기 위해 수도권 관광객을 유치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서울에서 3시간이나 걸리는 교통의 오지인데다, 한옥 몇채 모아놓은 대단하지도 않은 곳에 누가 올까라고 생각했다.

전주시장이 3번 바뀌는 동안 한옥마을은 꾸준히 그리고 조용히 변했다. 그 결과 2015년 현재 전주 한옥마을은 상전벽해가 됐다. 한옥마을의 범위도 수십 배 넓어졌다.

판소리 등 전통문화 공연, 다양한 맛 집, 전주천 생태하천 개발, 전주영화제, 호남선 KTX 완공 등이 상승효과를 내며 주말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많다. 슬럼화됐던 전주시의 구도심이 활기를 되찾았고, 슬럼화된 지역의 범위는 자연스레 줄고 있다.

2004년 12월26일 인도네시아, 태국 등 동남아 14개국을 휩쓴 쓰나미 사태로 23만여명이 희생됐을 때 북유럽의 스웨덴도 난리가 났다. 성탄절 휴가를 보내러 따뜻한 동남아를 찾았던 스웨덴 국민이 543명이나 희생된 것이다.

긴급 구조요청 전화를 받은 지 36시간만에 내각회의가 소집됐다는 것부터 문제가 됐다. 이후 스웨덴 재난관리청(MSB)이 4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출범했다.

해당 분야 최고 전문가로 구성된 ‘특별위원회’가 독립적 조사권과 최소 2년의 조사기간을 보장받고 학술세미나, 국내외 사례 조사, 각계각층 의견 수렴 등을 꼼꼼히 진행한 뒤 ‘특별보고서’를 제출한다.

정부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2년에 걸쳐 이해당사자의 이견을 조정해 사회통합과 효율성을 담보한 법과 정책을 만들어 냈다. 여야의 정치권과 행정부는 물론, 4년을 기다려주는 스웨덴 국민이 참으로 대단하다.

요즘 서울지하철 공사현장에 '조금 늦더라도 제대로 고쳐놓겠습니다'는 안내판을 보게 되면 흐뭇하다. '빠른 시일내에 고쳐놓겠습니다'는 과거 안내판보다 훨씬 믿음이 간다. 마포구의 성미산 공동체도 그렇고, 성동구 성수동의 사회적 기업도 그렇다.

조용히, 소리없이, 그러나 내실있게 변화하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선출직 정치인에게 있어 조용한 변화는 매력이 없다. 4년마다 유권자의 평가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 소리가 안 나고, 표시가 안 나는 프로젝트를 오랫동안 공을 들여 추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유권자 수준이 많이 올라갔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빈 프로젝트를 추진했다간 몇 년 안돼 들통나게 돼 있다. 뉴욕의 할렘과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그리고 스웨덴처럼 서울이나 다른 지자체에서도 ‘조용한 변화’가 계속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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