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의 양대 축은 ‘부정부패 척결을 통한 투명한 경제’과 ‘세계화를 통한 경제의 선진화’로 요약할 수 있다.
임기 초반부터 정치적 부담을 안고 정책을 밀어부칠 수 있었던 배경은 88서울 올림픽을 전으로 시작된 ‘3저 시대(저유가·저금리·저원화 가치)’가 지난 뒤 잠시 주춤했던 한국 경제가 메모리 반도체(D램)를 기반으로 노태우 정권 말기부터 다시 호황기를 맞았던 데서 비롯됐다. 적어도 역대 대통령에 비해서도 김 전 대통령은 돈 문제에 대해서는 가장 넉넉한 상태에서 임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과잉투자의 후유증과 국내외 경제정세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연이어 터진 사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서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는 상황을 만들었다.
◆금융·부동산 실명제로 경제 투명성 확보
김 전 대통령의 경제의 투명성 의지는 금융·부동산 양대 실명제로 대표된다. 가명 또는 차명으로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소유하며 막대한 부패와 비리 등 부정적인 지하경제를 형성하고 있는 자본을 수면 위로 드러내 국가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재원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취임 첫 해인 1993년 8월 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한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실시 배경을 설명했다.
금융실명제 실기의 충격이 가시면서 가명·차명 자금이 부동산으로 쏠리는 움직임을 원천 차단하기 위해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1월 6일 부동산 실명제 실시 계획을 발표했다. 두 정책은 김영삼 정부는 경제의 투명화와 더불어 정치권과 고위관료, 군 장성, 경제계 인사 등 사회 고위층들에 대한 ‘성역없는 사정’을 이뤄내는 강력한 수단으로 활용됐다.
◆‘신경제·세계화’ 추진, OECD가입 등 개방화 물꼬
김영삼 정부 집권 초반기는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이 바뀐 시기였다. 앞서 1992년에는 초대형 지역무역협정(RTA)인 ‘유럽연합(EU)’이 탄생했으며, 1994년에는 또 다른 RTA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가 체결됐다. 이듬해인 1995년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에서 한 단계 발전한 다자간 무역기구인 ‘세계무역기구(WTO)’가 발족됐다. 경제 패권을 잡기 위한 해외 국가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본격적인 다자간, 양자간 통상시대가 열린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흐름에 한국이 뒤처지지 않도록 ‘세계화 전략’을 제시, 빠른 경제 성장과 시장개방을 추진했다. 반대론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1996년 12월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이 대표적인 업적이다.
또한 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경제에 더욱 탄력을 받도록 하기 위해 민간 부문의 발목을 잡고 있던 정부의 규제를 대폭 개혁해 기업들의 투자 확대를 유도했다. 이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연간 수출 1000억달러 돌파,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그해는 한국경제가 가장 돈이 넘쳐 흘렀던 해이기도 하다.
◆곧바로 다가온 후유증, IMF 구제금융 신청
하지만 김 전 대표의 경제정책의 후유증은 OECD 가입 직후인 1997년부터 나타났다. 1995년 미국과은 강한 달러를 지향하는 정책으로 선회하고, 일본은 그해 1월 17일 발새안 ‘고베 대지진’ 피해복구를 명분으로 엔화의 평가절하를 실시, 되고 달러 대비 엔화가 급락했다.
국제적으로 태동한 금융권 자기자본비율(BIS) 기준이 8%라는 가이드가 제시되면서 일본은행들이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국가들로 나가있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일본의 엔화 약세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가 매년 규모가 커졌지만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이라는 대명제에 따라 국민소득을 유지하기 위한 고환율 정책만 고수했다. 경상수지 적자를 시장의 질서에 따라 환율의 변동을 통해 해소하는 정책이 아닌, 수입상품에 대한 규제를 통해 해소하려고 했다. 경상수지 적자의 누적, 일본의 자금회수, 금융사의 부실충당 등으로 우리나라 외환 사정은 극도로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리게 된다.
결국 1997년 1월, 제계 14위였던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4월 삼미그룹 부도, 7월 기아자동차 도산 등 대기업들의 사태가 이어졌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 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이런 가운데서도 김 전 대표는 부실기업에 대한 정리 대신 부도를 막으라는 상황과 전혀 맞지 않는 지시만 내렸다. 이미 일관된 경제정책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던 김영삼 정부는 끝까지 사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지 못했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를 선언하며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지나친 개방화와 산업 확대 및 수출산업 강화, 임금인상, 물가상승, 외화낭비 등 경제적 팽창까지 겹치면서 커질대로 커진 부실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가장 큰 부를 안고 임기를 시작한 김영삼 정부는 가장 적은 부를 후임 김대중 정권에 넘기고 말았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며 국민들에게 사죄했으나, 이후 한국사회가 입은 고통은 너무나도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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