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물고 있다. 1년 365일 중 350일이 지났다. 2015년은 을미년 ‘푸른 양’의 해였다. 내년은 병신년, ‘붉은 원숭이’의 해라고 한다. 항상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가듯 내년은 올해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연말이니까.
집이나 사무실에 걸어 놓으려고 크고 멋진 달력을 몇 개씩 받아 놓고 지인들과 주고받는 것이 연말 풍경 중 하나였다. 책상에 세워둘 데스크 다이어리도 예쁜 걸로 하나 챙겨야 했다. 업무계획도 수립하고, 부서별로 회의할 때마다 손에 들고 다니는 업무용 다이어리도 연말에 챙겨야 할 필수품이었다.
송년회에서 양복 안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는 포켓 다이어리를 선물 받았다면 왠지 내년에는 무슨 일이든 계획한대로 척척 잘 돌아갈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이런 연말 풍경이 핸드폰이 보급되고, 특히 최근 기능이 향상된 스마트폰이 일상화되며 많이 사라졌다. 충무로 인쇄소 골목이 연말이면 달력, 다이어리, 수첩 찍느라 바쁘게 움직였지만 지금은 옛말이 됐다. 이처럼 스마트폰 때문에 스마트해지지 않고 우울해진 사람들도 많다.
달력, 다이어리, 프랭클린 플래너 등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던 이유가 뭘까? 시간을 계획적이고 효율적으로 잘 활용하는데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농경시대에는 예정된 시기에 곡식을 파종하고 거름이나 비료를 주고 농약도 치고 수확해 식량을 확보했다. 그렇게 해야 목숨도 부지하고 가족을 건사하고 근심걱정도 덜 수 있었다. 산업화되고 정보화된 지금도 비슷하다. 한정된 시간을 잘 활용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준비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과하지 않다.
서머타임도 시간의 효율적 활용과 관련이 깊다. 2016년은 서머타임이 시작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16년 1차 대전이 한창일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연합군이 여름의 긴 아침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연료로 쓰이던 석탄을 조금이라도 절약하기 위해 표준시간을 한시간 앞당겼던 것에서 유래했다.
이를 보고 영국과 미국도 따라했다. 서머타임은 전쟁이 끝나고 사라졌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재활용됐다. 이후 1970년대 1, 2차 석유위기를 계기로 폭넓게 확산돼 지금은 세계적으로 75개국 가량이 서머타임을 적용하고 있다.
예를들어 유럽은 3월말부터 10월말까지 7개월에 걸쳐 서머타임을 실시한다. 우리나라도 과거 서머타임을 실시한 적이 있다. 1949년부터 1960년까지 실시하다 1961년 폐지됐고, 88올림픽을 전후한 1987년과 1988년에 시행하다 1989년에 다시 폐지됐다.
이처럼 다이어리, 스마트폰, 서머타임 등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수단과 제도가 있지만 우리하고는 거리가 멀다. 효율적인 시간활용의 측면에서 평가할 때 그리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얘기다.
얼마 전 영국의 공영방송 BBC에서 한국의 직장 풍경을 소개하면서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 향후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프리젠티즘’이란 직장에 출근했지만 몸이 아프다거나 스트레스 등으로 업무에 집중하기 어려운 상태를 말한다.
유사한 단어로 ‘앱센티즘’(absenteeism)이 있는데, 이는 직원의 잦은 결근으로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선진국의 다양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프리젠티즘이 앱센티즘보다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감기나 다른 질병을 확산시킬 수도 있으며, 부정확한 업무 처리를 통해 뒷수습하는데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는 얘기다.
아파도 일단 학교나 직장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이 우리의 암묵적 규칙이다. 직장 상사에게 불성실한 직원으로 찍히지 않기위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프리젠티즘’이 만연하고, 장시간 근로가 일상화되며 생산성이 떨어진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 어려워지고, 결혼이 늦어지며, 만혼의 신부들은 아이를 적게 낳을 수밖에 없다. 맞벌이가 필수인 시대에 살면서도 가사분담이 이뤄지지 않고 ‘프리젠티즘’의 만연으로 아이 하나도 제대로 기르기도 어려운 환경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만들어 내고 있다.
내년 병신년 연말에는 한 해를 뒤돌아보며 ‘빙신 같은 1년’이었다는 반성을 하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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