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관광 스토리텔링] 서귀포시 '솔동산 8경' 역사 문화거리로 탈바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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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4-2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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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진순현 기자= 서귀포시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솔동산’이 이야기속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다.

서귀포시(시장 현을생)는 ‘솔동산 8경’을 주제로 탄생된 문화 스토리텔링을 적극적으로 소개할 방침이라고 20일 밝혔다.

솔동산 8경은 전략적 군사기지 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병장수'가 계속 이어져 왔던 서귀진의 스토리텔링을 주테마로 하고 있다. 

△1경은 서귀진성(西歸鎭城) △2경은 목사고목(牧使古木) △3경은 서진노성(西鎭老星) △4경은 신작대로(新作大路) △5경은 장수지원(長壽之園) △6경은 송산고적(松山古跡) △7경은 중섭휴의(仲燮休椅) △8경은 백년수로(百年水路)다.
 

 

솔동산 1경 서귀진성은 조선시대 제주의 대표적인 방어유적이다. 1589년(선조 22년) 이옥(李沃) 목사가 송산동으로 옮겨 와 축성한 성으로 둘레는 825척5치이고, 높이는 12척이었다.

성문은 동과 서에 있었으며, 집채는 북성안 중앙에 객사를 두고 좌우로 무기고, 사령방, 포주, 창고 등이 배치되어 있다. 당시 서귀진에는 성정군 68명, 목자와 보인 39명을 합해 약 10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귀진성은 조선시대 제주의 방어유적인 3성 9진의 하나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솔동산 2경 목사고목은 서귀진성 축성시기 같은 해인 1589년 이옥 목사가 서귀진성 터에 자리한 팽나무로 수령이 400년을 훨씬 더한다. 이 팽나무는 오래된 큰 나무로서 생물학적 자료로서의 보존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우리 선조들의 정신생활을 엿볼 수 있는 문화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크다.
 

 

조선 초기의 성군인 세종대왕은 천문관을 서귀포로 보내 남극노인성을 보고 오라고 했다. 남극노인성을 보면 나라가 평안해지고 무병장수한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노인성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는 곳은 제주에서도 남쪽이 트여 있는 서귀포로 전해진다. 제주의 선인들은 솔동산 3경인 서귀진성에서 바라보는 노인성을 제주에서 빼어난 경치인 '영주 12경'의 하나로 꼽기도 했다.
 

 

솔동산 4경 신작대로는 1915년 지금의 서귀포시 동홍동 ‘굴왓’에 있던 면사무소가 송산동으로 이전되고 경찰주재소와 우편국 등이 들어서면서 산남의 중심지로 기반을 구축하게 됐다. 1920년 제주도지청이 개청됐으며, 이어 항만이 신설되고 일본 사이에 항로가 개설되고 1930년에는 금융조합 등의 산업기반시설이 들어섰다.

이처럼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 우편국, 제주도지청, 신작로등 근대적 행정관서가 집중되었던 곳이 바로 송산동이다. 서귀포항을 중심으로 한 송산동 일대는 일본인을 위한 경제특구이자 이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였다. 이 곳은 한때 ‘서귀포의 명동’으로 불리기도 했다.
 

 

솔동산 5경 장수지원은 유토피아와 다름없을 정도였다. 기원전 3세기 불로장생을 꿈꾸던 진시황은 방사 서복에게 명하여 영주산에서 불로초를 찾아 구해오도록 명했다. 서복일행은 서귀포 정방폭포 인근에 정박하였고 천문학에 능통한 서복은 노인성(수성)에 불로장생을 염원하는 제를 지내기 위해, 노인성이 가장 잘 보이는 이 동산에서 하늘에 제를 올렸을 것이라는 설에서 유래됐다.

 

 

솔동산 6경 송산고적은 일제시대 서귀포항 주변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여관을 포함해 잡화점, 식당, 당구장, 어구류상점, 병원 등이 있었다. 이 시기의 유산으로 일본식 주택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일본식 주택은 1960년대 초반만해도 즐비했으나 새마을운동 이후 대부분 사라졌다. 옛 솔동산 신작로를 상징하는 안거리밖거리 식당건물은 솔동산의 옛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솔동산 7경 중섭휴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이 한국전쟁 발발 후 서귀포 지역에 피난와 거주하며 ‘섶섬이 보이는 풍경’ ‘바닷가의 아이들’ ‘서귀포의 환상’ 등의 대표작을 탄생시킨 장소다. 이 곳은 이중섭은 사색의 쉼터였던 곳이다. 
 

 

솔동산 8경 백년수로는 420년전 도내에서 첫 조선시대 중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로 만든 목조저수지로 추정된다. 당시 선인들은 성 안에서의 식수를 해결하기 위해 정방폭포 원류인 정모시에서부터 이곳까지 1200m 구간의 물길을 열어 관개수로를 축조했다. 발굴된 수로는 매우 정교하게 축조되었고 수로위로는 돌 덮개를 씌워 성안 군사들이 활동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는데 지금의 수도관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 솔동산 스토리텔링 만드는 데는 송산서귀 마을회(회장 송보언)와 작가의 산책길 해설사회(회장 정영자)가 같이 힘을 모았다.

앞으로 작가의 산책길 해설사회는 매일 회원 2명이 이중섭거리에 있는 창작스튜디오에서 하루 4회에 걸쳐 솔동산 8경이 있는 솔동산 문화의 거리 안내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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