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당 이활의 생애-17]미국·일본 들러 고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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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6-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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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주경제신문-한국무역협회 공동기획 (17)

  • 제1장 성장과정 - (12) 10년만의 귀국길

목당 이활 한국무역협회 명예회장[일러스트=김효곤 기자 hyogoncap@]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일본에서 3년, 영국에서 9년을 합해 12년에 이르는 해외생활이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37세가 되도록 면학(勉學)의 길을 걸은 것이며, 그것은 참으로 긴 배움의 여로(旅路)였다.

해외에서 새로운 학문을 익히고자 한 것이 목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나라 잃은 국민으로서 조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은 심정도 그가 그토록 오래 해외에 머문 이유에 포함되었다. 고향 집에는 그의 성장한 모습을 보고자 기다리고 있는 양친과, 또한 그분들 못지않게 기다려 온 아내가 있음에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 않던가. 목당이 귀국 했을 땐 이미 동생들이 모두 결혼을 하고 아이들까지 두고 있었다. 홍(泓)은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현 교토대학) 경제학과를 나와 잠간 경북도청(慶北道廳)에 몸담았다가 그만두고 자기사업을 하고 있었으며 그 밑의 담(潭)은 중앙고보(中央高普, 현 중앙고등학교)를 나와 가사(稼事)를 돕고 있었다. 그리고 막내 호(澔)는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현 도쿄대학) 법학과에, 목당의 장남 병인(秉麟)은 니혼대학(日本大學)에 재학중이었다. 둘은 목당이 귀국길에 일본에 들러 만났고 같이 귀국했었다. 모두 10년 만에 재회한 가족들이었다.

목당이 귀국을 결심했을 때는 귀국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것은 잠시이고 마음 한편으로는 식민지 조국과 함께 그의 뇌리엔 암담하고 불안한 그 무엇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일제가 유럽 유학생인 목당 그를 이단(異端)으로 취급할 것이라면 그의 조국에서의 생활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것은 뻔한 일이 아닌가.

그런 것을 생각하며 그는 귀국이 두렵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목당은 그런 모든 예상되는 고통을 각오하고 귀국을 결행하고 만 것이었다.

1935년 11월 영국을 떠나 미국을 거쳐 일본에 닿은 목당이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1905년부터 1945년까지 부산항과 일본 시모노세키 항 사이를 정기적으로 운항한 여객선)에 실려 귀국 길에 오른 것은 다음해 4월이었다. 겨우내 계속되던 우중충한 날씨도 좋아져서 꽃이 만발한 계절이 되어 있었다. 더욱이 5월에는 모친 손(孫)씨 부인의 회갑 잔치가 다가오고 있었고, 동생 홍의 편지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머니 회갑 잔치에는 꼭 귀국하여야 한다고 독촉하고 있던 것을 목당은 잊을 수 없었다.

호는 그동안도 꾸준히 소식을 전해 주었고 늘 영문(英文)으로 써보내는 그의 편지는 반가움과 함께 늘어가는 영어 구사의 실력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하였다. 호는 경복중학교(景福中學校) 3학년 때 광주학생사건(光州學生事件, 광주학생항일운동. 1929년 11월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운동으로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을 맞아 시위에 가담하였다가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뒤 일본에 건너와 도시샤중학교(同志社中學校)와 큐슈(九州)의 사가고등학교(佐賀高等學校)를 거쳐 도쿄제국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목당은 영국을 떠나면서 그동안 사 모았던 많은 책들을 선편으로 일본의 호에게 부치면서 잘 보관하여 줄 것을 부탁하였었다.

목당은 앞서 말한 대로 귀국 길에 미국으로 우회하였으나 여러 사람을 만나거나 여러 군데를 여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에서 한 달 가량 머물렀지만 그곳을 떠날 때의 그의 가방 속에는 몇 장의 독립신문(獨立新聞, 1896년 창간된 국내 최초의 민영 일간지. 1899년 폐간됨)이 더 들어 있었는데 이로 미루어 그는 거기서 재미 조선인회(在美 朝鮮人會)를 찾아 몇 사람을 만났음에 틀림없었다.

그가 만난 사람 가운데는 영국에서 사귀다가 컬럼비아 대학으로 돌아간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도 끼어 있었다. 설산은 목당보다 네 살 연상으로서 일찍이 1916년 일본 와세다 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 맹활약을 하다가 동아일보 창간에 주간(主幹)으로 참가, 부사장 겸 주필로 언론활동을 전개하던 끝에 유학, 오리건 대학에서 신문학을, 컬럼비아 대학에선 경제학을 전공하여 석사학위를 받았다.

목당이 영국에서 구독한 삼일신보(三一申報, 1928년 미국에서 창간되었던 주간 동포신문. 1930년 6월 폐간됨)는 바로 설산이 컬럼비아 대학에 재학하면서 허정(許政, 1896∼1988년. 정치인. 초대 교통부 장관, 사회부 장관, 국무총리 서리, 서울특별시장을 거쳤으며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외무부 장관을 겸직하며 과도정부 수반이 됐음), 서민호(徐珉濠, 1903∼1974년. 정치가. 광복 후 광주시장, 전남도시장, 2대·5대 민의원의원, 민의워부의장 역임), 김양수(金良洙, 1896∼1971년. 독립운동가. 삼일신보 주필을 지냈으며, 조선어학회에 참여해 사전편찬사업의 재정적 지원을 담당. 광복후 원자력원장을 역임) 등과 함께 발행한 신문이었다.

1925년 경 목당이 와세다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부터 그는 설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는데 유학생들 사이에는 그가 와세다 대학 웅변대회에서 ‘동양평화와 일본의 민주주의’라는 연제(演題)의 열띤 웅변으로 1등에 입선한 일과, 1916년 와세다 대학에서 최두선(崔斗善, 1894∼1974년. 교육인·언론인·정치인. 육당 최남선의 동생. 중앙보고 교장, 동아일보 사장, 대한적십자사 총재, 제3공화국 초대 내각 국무총리 역임)이 철학과에서 1등을, 현상윤(玄相允, 1893~ ?. 사학가이자 교육가. 3·1운동 계획과 추진에 참가했으며, 중앙고보 교장,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을 지냄. 광복 후 보성전문학교 교장에 취임, 고려대학으로 승격되자 초대 총장이 되었으나 6.25전쟁 중 납북됨)이 사학과에서 1등을 했을 때 설산은 정경과에서 2등을 차지했으며 이광수(李光洙, 1892~1950년. 문학가·언론인)가 특대생으로 영문과에 재학중이어서 몇 안되는 조선학생들이 와세다를 압도했다고들 마치 신화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런 설산은 졸업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1918년 12월 역시 그곳에 망명해 와 있던 여운형(呂運亨1886∼1947. 독립운동가·정치가. 상하이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조선건국동맹 위원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당 당수 역임), 조동우(趙洞祐, 본명은 조동호(趙東祜), 1892~1954년. 독립운동가·사회주의운동가·언론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사료조사편찬부원, 독립신문 기자 역임), 김철(金澈, 1886∼1934년. 독립운동가. 대한적십자회의 상의원, 임시정부 교통부차장, 임시정부 국무원 회계검사원 검사장 역임), 김규식(金奎植, 1881∼1950년. 항일독립운동가·정치가·학자. 신한청년당 대표, 민족혁명당 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 역임), 선우 혁(鮮于 爀, 1882∼? 독립운동가. 신한청년단 이사 등 역임) 등과 그 자신이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고 김규식을 특사로 하여 파리 강화회의(講和會議)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제출하기도 하는 등 활약하였고, 그 뒤 12월 말에는 설산 장덕수 자신이 일본과 국내에, 김철, 선우 혁, 서병호(徐丙浩, 1885∼1972년. 장로교 장로·독립운동가·교육가. 신한청년당 당수, 제헌의정원 내무위원, 경신학교이사장 등 역임) 등은 국내에, 여운형은 러시아에 파견되어, 종교계와 사회단체의 유지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 실행방안을 의논하도록 한 결정에 따라 상하이를 출발, 일본 나카사키(長崎)를 경유 3월에는 도쿄를 거쳐 귀국하여 서울에 잠입하였으나 이내 일본경찰(日警)에 체포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그 다음해에 일어난 3·1 운동을 그는 경찰부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맞았는데 이 항쟁에 직접 가담하지 못한 것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 그는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하의도(荷衣島, 전라남도 신안군 하의면에 속한 섬으로 목포에서 남서쪽으로 약 50.76km 해상에 위치)에 거주제한(居住制限)을 받고 풀려나기도 했다.

목당이 설산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으로 느끼는 것은 그의 하의도에서의 석방이었다. 1919년 11월, 일본의 하라 다카시 내각(原敬內閣, 1918∼1921년)은 조선 독립운동의 해결책으로 ‘국내에서는 48인의 옥중회의(獄中會議)를 개최하고 해외 독립운동자와의 접촉으로 조선을 자치(自治)로 해결하려는 안’을 내걸고 상하이에 체류중이던 일본인 목사 와타세 츠네키치(渡瀨常吉)에게 의뢰하여 임시정부의 대표를 초청하도록 하였다. 이에 일본 척식국(拓殖局, 식민지 관할기관) 장관 명의로 된 초청장을 받은 상하이임시정부에서는 외무장관 여운형을 대표로 파견키로 하자, 여운형은 일본어 통역으로 장덕수를 대동할 것을 제의하여 쌍방이 합의하기에 이름으로써 설산은 하의도에서 풀려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곧 일본으로 건너가 여운형의 통역으로 도쿄 제국호텔에서 200여 명의 기자들을 상대로 대한 독립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때 이 연설을 경험한 사람들은 몽양(夢陽) 여운형의 본연설(本演設)보다 설산의 통역이 훨씬 호소력이 강하고 훌륭하였다고들 이구동성으로 칭찬이 자자하였다.

1920년을 전후한 시기는 우리 조선인들이 독립하고자 하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던 시기였으며, 이때 가장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인 독립투사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설산 장덕수였던 것이다.

다정다감하고, 겸손한 인격자이면서 속이 확 트인 설산을 목당은 존경하였으며, 그에게서 인간적인 매력까지를 느꼈는데, 특히 그가 컬럼비아 대학 경제학교수인 싱코비치와 실용주의 철학자 존 듀이 등 석학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영국 라스키 교수의 개량주의적(改良主義的 정치학 강의와 비교하여 나름대로의 의견과 탁월한 식견을 피력하는 모습은 목당으로서는 너무나 큰 감명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목당이 이런 설산을 만나는 등으로 한 달 남짓의 미국 여행을 마치고 일본 호화여객선 아사마 마루(淺間丸)로 고베(神戶)에 상륙한 것은 4월 말이었다. 연락을 받은 아들 병인과 동생 호가 그가 도착하는 부두에 마중나와 있었다.

영천보통학교(永川普通學校)에 다니는 것을 보고 떠난 아들 병인이 어느새 젊고 씩씩한 청년으로 성장해 있는 모습을 대하며 아버지 목당은 너무도 대견스러웠고 새삼 자신이 얼마나 긴 여행에서 돌아온 것인가를 되새겨 보게 되는 것이었다. 아우 호도 그동안 자주 서신을 보내주어 근황을 잘 알고 있는 편이었으면서도 그 역시 막상 만나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의젓한 모습인데 또한 기뻤다.

그들은 고베에서 유명하다는 독일식 레스토랑에 들러 랍스타(Lobster, 바닷가재) 요리를 주문하는 등 오랜만의 상봉을 마음껏 즐겼다.

그러나 즐거운 시간에도 일본 사복 형사가 그들을 미행하고 있었으니, 그들이 음식점을 나와 도쿄행 열차를 탔을 때도 형사는 계속 그들을 미행했고, 그들이 도쿄역에 하차하자 다른 형사가 인계받고 있었다. 미행에 쫓기면서 마침내 호는 결론처럼 이렇게 말했다.

“일본에서나 고향에 돌아가서나 형님은 틀림없이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유럽에서 공부한 지식인으로서 미국까지 들러 들어오는 그를 일본 경찰이 요관찰 인물(要視察 人物)로 취급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며, 다만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목당은 적이 불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 밤 도쿄 혼고(本鄕)의 아담한 일본 여관에서 이들은 잠을 같이하며 호와 목당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당은 주로 그가 유럽과 미국에서 겪고 느낀 바를 이야기하고 호는 현재 돌아가는 일본의 정세와 조선의 사정에 대해 오래 현장을 떠나 있었던 형에게 설명하였다.

다음날 목당은 도쿄의 히비야(日比谷) 공원과 긴자(銀座) 거리를 둘러보면서 그가 공부하던 시절과는 많이 변해 있는 것을 알았다. 식민지 경영의 혜택을 입어 일본의 경제 규모가 엄청나게 커가고 있음을 거리 모습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도쿄제국대학 앞 혼고의 책방을 둘러본 목당은 전보다 사회주의에 대한 원서(原書)가 더 많이 진열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긴 도쿄제국대학에도 좌파교수들의 강의가 학생들의 인기를 끌고 있으며. 미노베 다츠키치(美濃部達吉) 교수가 헌법 강의에서 천황기관설(天皇機關設, 미노베 교수가 주장한 헌법학설. 천황이 국가통치권의 주체임을 부정하고, 통치권은 법인인 국가에 속하며, 천황은 그 최고기관으로서 통치권을 행사하며 통치권 또한 헌법이 정한대로만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고 나와 일본 군부가 들고 일어나는 등 어수선한 시국임을 호가 전날 밤 이야기해 주지 않았던가.

군국주의와 사회주의의 갈등으로 일본도 사상적으로 열병을 치루고 있는 것은 목당에게 묘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했다. 프랑스도 그렇지 않던가. 국내에서는 지식인들이 공산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들 해외 식민지에서는 공산주의자들과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정치적 희극을 연출하고 있지 않던가.

아들과 아우를 만나고 일본의 정치, 사회 상황을 보기 위해 일본에서 2, 3일 머문 다음 목당은 곧 모친의 회갑연(回甲宴) 날짜에 맞추어 병인을 데리고 귀국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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