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의 장점 중 하나는 사람을 아낀다는 것이었다. 뛰어난 인재라고 생각하면 이념이나 사상과 관계없이 발탁했다. 빨치산 토벌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더 적극적이었다. 차일혁에게 과거의 경력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더 중요했다. 과거의 화려한 학력이나 경력 등 허명(虛名)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일이 잘되고 못된 데에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여겼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생각을 가졌다. 사람이 일을 한다고 여겼다. 이는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의 최대 자산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간부와 부하들이었다.
차일혁의 빨치산토벌부대는 창설 때부터 무기와 장비가 빈약했다. 토벌부대가 빨치산들보다 무장력이 약했다. 차일혁은 그런 불리한 점을 자신의 전투지휘능력과 조직 그리고 이를 지휘하는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함으로써 극복해 나갔다. 차일혁은 독립군시절부터 일본군보다 훨씬 열악한 무기와 장비를 갖고 싸웠던 경험을 갖고 있었다. 차일혁은 그때마다 뛰어난 지략과 용기를 앞세워 일본군에 맞서 이겼다.
차일혁은 빨치산토벌대장이 되자 토벌부대 내에 ‘특수한 부대’를 만들어 운용했다. 제18전투경찰대대 창설 직후에는 북한 인민군에게 부모를 잃은 유자녀들로 편성된 ‘화랑소대(花郞小隊)’를 조직했다. 삼국통일의 주역이었던 신라시대 화랑(花郞)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명칭이었다. 이들은 삼국을 통일한 화랑들과 나이도 비슷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애국심도 투철했다. 이들 대부분은 17살에서 18살의 청소년들로, 스스로 전투경찰이 되겠다고 자원한 나이어린 ‘애국투사’였다. 기백과 의기만큼은 신라 화랑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이들은 누구보다 반공정신이 투철하고 국가관이 뛰어났다. 빨치산 토벌에서 이들은 몸을 사리지 않고 임무를 완수했다.
이한섭이 지휘하는 화랑소대는 차일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951년 초, 칠보발전소에서 빨치산들의 포위망을 뚫고 들어가 작전명령을 전달함으로써 칠보발전소를 탈환할 수 있게 만들었고, ‘남부군사령관’ 이현상 부대가 기습하여 장수군 명덕리를 장악한 뒤 경찰에 회담을 제의해 왔을 때도 크게 활약했다. 빨치산의 회담 제의에 차일혁을 비롯한 경찰수뇌부는 의아했다. 그렇다고 빨치산의 제의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경찰과 많은 주민들이 포로로 잡혀있기 때문에 거절할 입장이 못 됐다. 회담에 응하는 척 하면서 적정(敵情)과 적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를 빨치산소굴로 보내야했다. 차일혁의 머릿속에 화랑소대장 이한섭이 퍼뜩 떠올랐다.
그만큼 그를 믿고 있다는 증표였다. 그래서 이한섭에게 “자네가 이 임무를 맡아주겠나? 어쩌면 죽으러 가라고 하는 것이나 같은 말이지만, 명령은 아니니까 내키지 않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 차일혁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화랑소대장은 “대장님 말씀이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하며 기꺼이 응했다. 그리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수첩과 경찰관 증명서를 꺼내 놓고 갔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차일혁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비록 적정 파악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보낸다고 해도 생사가 어찌될지 모를 상황에서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부하의 안위가 걱정됐다. 다행히 이한섭 소대장은 무사히 귀환했다. 1951년 7월 15일 오후 4시였다. 같이 갔던 장수경찰서 경비주임과 함께 이한섭 화랑소대장이 돌아왔다. 차일혁은 화랑소대장을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차일혁의 부대원들은 이처럼 한 동기(同氣)처럼 서로 위하고 행동했다.
차일혁은 유능한 인재라면 적이라도 포용해 발탁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김창순(金昌順)으로 밝혀진 김명주이다. 김창순은 북한문제 전문가로 명성을 떨쳤던 당대 최고의 학자이자 지식인이었다. 그는 노당신문 부주필까지 역임했던 골수 공산분자였다. 그런 그가 포로로 잡혀 있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됐다. 차일혁은 지리산을 평정하고 이현상을 토벌하기 위해 설치된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에 보직됐을 때 반공포로들로 구성된 618부대를 예하에 두고 작전을 실시했다. 618부대는 1953년 6월 18일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지시로 석방된 반공포로들로 구성됐다. 그들은 북한군, 특히 빨치산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618부대는 약 2백 명으로 이루어진 특수부대였다. 북한군으로 빨치산을 잡는 격이었다. 최초 618부대의 부대장은 북한인민군 연대장 출신의 중좌였고, 부관은 김명주였다. 대원들은 모두가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618부대의 실질적인 지휘관 역할은 김명주가 했다. 대원들은 술주정이 심하고 대원들을 함부로 다루는 인민군 연대장 출신의 부대장 대신 부관인 김명주를 더 신뢰하고 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대원들은 차일혁에게 김명주를 부대장으로 임명해 달라고 건의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차일혁도 김명주의 사람됨과 지휘력을 보고 사령부에 건의하여 그를 부대장으로 임명했다. 인재를 아끼고 발탁하는 차일혁 다운 일처리였다. 김명주는 곧 부대를 정비하고 대원들을 훈련시켜 618부대를 서남지구전투경찰대 내에서 가장 강한 부대로 만들었다.
김명주는 가냘픈 선비형이었다. 하지만 지휘력은 외모와는 전혀 달랐다. 부하들을 친동생처럼 따뜻하게 감싸며 지휘했다.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었다. 박학다식(博學多識)하여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차일혁은 대화를 나누면서 점차 그를 부하가 아닌 선생으로 대하게 됐다.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 어느 것이든 막힘이 없었고, 어학에도 능통했다.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까지 두루 섭렵했다. 여기에 볼세비키 역사에 대해서도 일가견을 갖고 있었고, 중국 공산당 내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도 정통했다. 특히 중국 공산당 군대의 성격과 부대 운영방식에 대해서는 훤했다.
차일혁과 함께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면 너무나 일목요연하게 설명하는지라, 한때 중국군 장교로 있었던 차일혁도 놀랄 지경이었다.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창설 이후 다시 차일혁 부대의 취재를 맡게 된 김만석(金萬錫) 기자도 김명주와 대화를 나눈 후 그의 박학다식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김 기자는 차일혁에게 “김명주 군이야말로 이 땅에 둘도 없는 수재임에 틀림이 없소. 그런 아까운 인재가 총을 잡고 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 같은 지방신문 기자보다 한 차원 높은 합동통신 전주지사장 자리에 추천하고 싶은데 대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라고 말했다. 차일혁도 가만있지 못했다. “물론이오. 김명주와 같은 인재가 이곳에서 썩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소. 김 기자가 잘 알아보고 좋은 자리가 있으면 김 선생을 이곳에서 하루 빨리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 차일혁을 보고 김만석 기자도 부러움 반 농담 반 비슷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 “연대장님은 정말 인복(人福)이 많은 사람입니다.”
차일혁은 김명주가 전투경찰보다는 학자가 더 어울릴 것 같아 618부대를 그만두고 신문기자나 다른 것을 해보라고 권유했지만, 약한 몸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일혁이 연대장을 마칠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런 김명주가 차일혁도 싫지 않았다. 심지어 차일혁은 단둘이 있을 때면, 김명주를 부하가 아니라 선생으로 불렀고, 또 그렇게 대했다. 김명주는 부하들을 친형제처럼 대하고 이끌었기 때문에 618대원들은 언제나 사기가 높았다. 618부대는 차일혁을 도와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이 빨치산 토벌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현상 체포를 위한 압축수색작전 때도 그랬고, 잡혀간 김동진 1대대장을 구출할 때도 그랬고, 이현상을 사살할 때도 그랬다. 나중에 차일혁은 김명주를 북한문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추천했다. 이후 김창순으로 변신한 김명주는 국내 최고의 북한전문가로 명성을 떨치며 커다란 학문적 업적을 쌓게 됐다. 차일혁과 함께 지리산에서 육체적으로 싸웠던 빨치산 토벌이 ‘총으로 하는 무력전(武力戰)’이었다면, 이후 수행한 학문적 성과는 ‘북한 공산주의에 대한 사상전(思想戰)’이었다. 김명주가 그렇게 학문적으로 대성하기까지에는 차일혁의 인재를 아끼고 재능을 살리는 깊은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끝〉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